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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보다 통합당 참패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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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보다 통합당 참패 걱정"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20.04.2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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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정치 풍운아 홍문표 돌아보기
네 번 낙선 네 번 당선, 전국 최고령

4월 15일 밤 10시 텔레비전 개표방송에서 '당선 확실'로 표시된 홍문표 당선자가 홍성읍 오관리 홍문표 사무실에 들어서자 수많은 지지자들이 박수와 환호로 맞았다. 기다리던 기자 한 사람이 당선 소감을 묻자 과거에는 듣지 못하던 발언을 했다.

“함께 경쟁했던 김학민 후보께도 감사와 위로를 전합니다. 선거가 끝난 만큼 모두 화합하고 단합하여 홍성ㆍ예산 발전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여 최선을 다합시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분들의 뜻 또한 잘 헤아려 분열과 대립을 넘어 상생과 통합으로 홍성ㆍ예산 발전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당선자는 4년 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이번 선거에서 자행된 (상대 후보측의)불법 선거운동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고 날선 뒤끝을 남기던 때와 사뭇 달랐다. 이번 우리 지역 선거가 과거에 비해 큰 불법, 혼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며 4선 의원이 된 당선자의 중량감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또 한 기자가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정색을 하며 “황교안 대표”라고 대답했다. 서울에서 황교안의 낙선 소식이 자신의 기쁨 못지 않게 무겁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당선 소감문도 같았다.

“저의 당선의 기쁨보다 미래통합당이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해 4선 중진 의원으로서 막중한 책임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특히 국가적 재앙인 코로나 극복을 위해시급히 국회에 등원하여 민생경제를 살릴수 있도록…”

홍문표 당선자는 충남에서 아산 이명수 당선자와 함께 최다선 의원이 됐다. 공주 정진석 당선자는 비례대표 경력을 빼면 3선의원이다. 올해 만 72세 홍문표 당선자는 수원 김진표 당선자와 동갑, 전국에서 최고령 당선자로 알려지고 있다. 역대급 참패를 당한 미래통합당의 중진의원들이 대거 낙선하고 황교안 대표 사표 등으로 비상체제에 들어간 당에서 홍문표 당선자에게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맡길지, 야당의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홍성 지역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홍문표 당선자는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비박근혜계’ 의원 29명과 함께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 새로운 당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홍 의원을 포함한 13명 의원은 4개월 만에 다시 자유한국당에 들어갔다. 당시 박근혜 탄핵과 탈당, 복당 등을 같이 했던 김무성, 유승민, 김성태, 홍일표, 황영철 등 중진들이 이번 선거를 거치며 퇴장하고 홍문표 의원만 살아남았다. 홍문표 당선자도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는 2018년 12월 홍문표 의원을 비롯한 현역 의원 21명의 당협위원장 자격을 박탈하거나 공모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두 차례에 걸친 조직위원장 공모에 이상권, 김용필 등이 신청하는 등 홍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판에 가까스로 경선을 통해 생환했다.

홍문표 당선자의 끈질긴 생명력은 5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홍문표 당선자는 1967년 20세, 건국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신민당 대표인 유진오 박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해 청년국장을 맡아 운동한 것이 정치에 첫 발을 들여놓은 시작이었다. 보충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신민당에 들어가 공식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한때는 1979년 32세때였다. 유진오 박사 선거운동부터 53년,공식적 정당인 생활 41년이 됐다.

신민당에서 청춘을 바친 그는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지도자급 정치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정치를 해왔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은 대통령 되기 전에 홍성을 찾아와 국회의원에 출마한 홍문표 후보 지원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가 진보정당에서 보수정당으로 바꾼 계기는 1996년 4월15대 총선 패배였다. 그는 당시 꼬마민주당으로 불린 정당 후보로 출마 했으나 신한국당 이완구에게 패배했다. 당시 꼬마민주당은 노무현, 원혜영, 장석화 등 11명만 당선돼 교섭단체가 불가능해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각자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이회창의 신한국당 중 하나를 선택해 가기로 했다. 조직을 장악하는 직책에 있는 홍문표를 김대중과 이회창이 서로 끌어가려고 손짓했다. 고민 끝에 홍문표는 이회창쪽으로 갔다. 그는 자서전 <뚝심>에서 “나는 아무래도 보수성향인것 같고 이회창은 대쪽이라 불리며 신선해 희망을 줄 것 같고 고향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썼다. 홍문표는 그후 이회창과 함께 보수정당의 길을 걷게 됐다.

홍문표 당선자는 '최다 낙선, 최다 당선'이라는 두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1988년 첫 출마 후 네 번 떨어지고 2004년 17대에 다섯 번째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당선이 확실시된 15일 밤 한 기자가 4선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는 “생활정치를 해 왔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인정받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수천명 결혼식 주례를 비롯해 틈만 나면 지역에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자서전 <뚝심>에서는 거듭된 낙선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떨어졌을 때 참으로 침통했지만 희망을 보았다. 처음 나왔을 때보다 표가 계속 늘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어느덧 최고령 의원이 된 정치 풍운아 홍문표 당선자의 정치역정은 한국 정치사의 질곡을 그대로 안고 온 여정이었다. 그 가운데서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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