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2024년 새해는 신독(愼獨)의 자세와 이타심이 필요할 때다

지난해는 누군가에겐 좋은 해가 되었겠지만, 또 누군가엔 하루하루가 버티기 힘든 한 해로 하루빨리 새해가 밝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마도 새해에는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꿈꾸며 맞았을 2024년 새해가 밝았다. 요즘 세상은 전 세계가 하나인 글로벌 세상이라고 한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먼 남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저 남의 일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파급력이 바로바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진, 폭우, 폭설과 이상기온 등 자연재해는 세계의 넓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와 이스라엘과의 전쟁 등 국가와 이데올로기와 민족 간에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양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해결은 어려워지고 있다. 심지어 가장 부유한 나라들도 경제적인 침체와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있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한다. 이런 현상에 더해져 도덕성의 저하와 결여는 범죄의 증가와 사회적 타락의 근원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이제 인류는 범지구적인 멸망으로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전 세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재난, 전쟁 등에 나는 아무 관련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먼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앞서 말했듯 글로벌 세상이 된 지금 우리의 일, 나의 일이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인류의 종말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철학가인 단테(1265-1321)는 ‘희망이 없는 것은 지옥’이라고 했다. 2024년 새해를 맞는 우리가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 된다. 지옥은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 있다. 바로 희망 없는 절망 상태 말이다.

절망의 크기를 줄여가고 희망의 크기를 키워가기 위해서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단단해진 나를 만들어 가려는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신독(愼獨)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비록 잘못을 아예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될 수 없을지라도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타심이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대가 왔다, 신약 시대의 안티오크를 제대로 묘사한다면 빈곤, 위험, 공포, 절망 그리고 미움으로 가득 찬 도시다. 아이들의 반이 태어날 때나 유아기에 죽었고, 살아남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적어도 부모 한쪽을 잃었다. 도시에 가득 찬 미움과 공포는 인종적 적대감이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교들과는 달리 서로가 주릴 때 먹을 것을 나누어 먹었고 목마를 때에 나보다 먼저 남에게 마시게 했고, 헐벗은 나그네를 영접했다.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혔고, 병든 자를 돌보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3세기 동안 두 번의 전염병이 로마 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고 한다. 이때 로마제국 전 인구 30%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병원균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염병은 이교도와 기독교도 모두에게 퍼졌을 것이다. 그런 환자들에 대한 두 집단의 대응 조치는 엄청나게 달랐다. 260년경에 창궐했던 두 번째 전염병을 겪은 뒤에 디오니시우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다른 이들만을 생각하는 무한한 사랑과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위험에 개의치 않고 아픈 사람들을 맡아 수발을 들면서 그들과 함께 평안한 행복을 느끼며 이승을 하직했다.” 디오니시우스는 계속해서 비기독교도들이 그 질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감염된 환자들을 추방했으며, 가까운 혈육일지라도 환자에게서 도망쳤으며, 때로는 환자들이 죽기 전인데도 도로에 던져버려 매장하지 않은 시체처럼 불결하게 취급했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를 사랑이라 표현하지만, 이것은 인류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한 이타심이었다. 2024년 새해를 맞아 우리 자신에게는 신독(愼獨)의 자세와 우리 이웃에게는 따듯한 이타심이 널리 널리 퍼지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고대한다. 그러면 희망의 크기는 커지고 절망의 크기는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