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마을 유래와 역사
내남마을은 ‘남당,남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것으로 내남마을은 백제시대에는 결기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결성현 사곡면에 속했다가 조선후기에 하면으로 변경, 조선시대 말엽에 은하면에 편제됐다.
175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따르면 내남리가 사곡면 남당리로 기록되어있다. 1789년 호구총서(戶口總書)에는 사곡면이 사라지고 은하면에 편입된 것으로 기록된다. 호구총서에는 남당리가 조곡리에 이어 은하면 마을중 두번째로 되어 있다. 인근 거산리와 학산리의 옛지형은 모산만이 만입하는 해안지역이었다. 바닷물이 인근 거산교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서부면에 가면 남당리가 있고, 은하면에 가면 내남리 남댕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내남마을은 특정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집성촌은 아니다. 그러나 1960~70년대 마을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60호중 10호 정도가 경주정씨였다. 1931년생 경주정씨 양경공파 정준섭씨에 의하면 조선말기~대한제국시대에 경주정씨가 내남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경주정씨 6대조 정우성의 부인 달성 서씨가 안면도에 거주하다 전염병이 돌던 해, 아이를 데리고 피신하면서 내남마을에 정착했다.
배를타고 도착한 곳이 금리천 항구가 있던 내남마을이었고, 자손을 남기면서 경주 정씨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정씨 대부분이 마을에 오래 세거하지않고, 외지로 나가살면서 집성촌을 형성하지는 않게 됐다.
내남마을에는 예로부터 천석꾼이 많았다고한다. 그중에서도 마을주민들이 지금도 기억하는 천석꾼으로 ‘김주사’라 불리던 안동김씨 김병창, 자선가로 알려진 경주정씨 정용해, 이첨사라고 알려진 이하범이 있었다.
전언에 의하면 김병창은 내남마을 일대 산과 논, 밭을 소유한 부자였으며, 기와집에는 사람들을 혼내는 광이 있었다고 한다. 정용해는 마을자선가로 알려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베풀고, 인근 결성과 은하면 주민들의 세금도 내주었다고 한다.
내남마을은 총2개반으로 구성되는데 마을회관이 위치한 1반을 ‘아랫마을(아랫말)’, 은하감리교회가 있는 2반을 ‘윗마을(웃말)’이라 부른다. 아랫말과 웃말을 구분하는 산모랭이에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방앗간이 있었다. 유연금씨의 남편 고(故)정원섭씨 일가가 운영했던 방앗간으로1980년대쯤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마을주민들은 지금도 방앗간을 기억한다.
내남마을에 전화가 들어 온것은 1972년 정준섭씨가 이장재임 시 은하면사무소에서 마을마다전화 한대 씩을 개설해줬다고 한다. 마을내 급한 연락을 취할 때는 정준섭씨 집전화를 이용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 | 쿰쿰한 담뱃잎 너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 온 것은 1600년대 초로, 300여년간 자유경작을 하다가 1921년부터 전매 경작으로 돌렸다. 담배는 남미가 원산지인 아열대 및 열대작물로 대략2m정도 자란다. 원산지에서는 다년생 작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월동이 힘들어 해마다 심는다. 1960~70년대 농촌에서 담배농사는 판로가 확실하고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농사였다. 그러나 워낙 담배농사가 힘들어 농촌이 고령화되면서 현재 담배농사를 짓는 농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내남마을이 처음 담배농사를 짓게 된 것은 고(故) 정한조씨의 영향이다. 정한조 씨는 결성면을 자주다니면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많이 접했고, 해방이후 우연히 담배종자를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판로가 확실했던 담배농사를 한 때는 40여 가구가 담배농사를 지었지만, 워낙 고된 일에 중간에 그만 둔 가구가 더 많았다. 현재는 최병창, 이종익씨 두 가구만이 담배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 담배농사를 언제까지 지을 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담배농사는 지금 보다는 예전이 훨씬 더 품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였다. 1월에 전매청에서 담배씨를 받거나 구항면 마온리에 가서 모종을 사온다. 4월 중순이 되면 판에 가식을 한다. 5월에 밭에 정식한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 내남마을에서는 인근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나무를 X자로 세워놓고 짚으로 엮어 담배를 걸어 말렸다.
최병창씨 부인 정지준씨는 “그때는 비닐도 흔하지 않은 때라 비가 오는 날이면 거적대기나 밀대방석을 가져다 덮어두고는 했다. 지금도 일이 많지만 그때는 일이 더 많았다. 지금도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면 뭐해서 먹고사나 하는 마음에 그만 둘 엄두를ㅜ 못낸다”고 말한다.
담배가 자라면 가장 더운 7월에 담뱃잎 수확을 한다. 담뱃잎은 하엽, 중엽 ,상엽으로 나뉜다. 마치 상추를 아래에서 부터 따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잎이 하얗고 보드라운 것이 하엽, 잎이 두껍고 붉은 것을 상엽, 중엽을 담뱃잎 중 가장 최상품으로 쳐준다.
최병창씨와 함께 담배농사를 짓고 있는 아들 최인성씨는 “날만 좋으면 담뱃잎을 1번 정도 더 딸수 있다. 담뱃잎을 말리는 데는 거의 6주 정도가 소요된다”고 말한다.
비닐하우스에서 말리기 전에는 담배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서는 건조장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남마을에서 담배농사를 지어온 이종익씨는 아픈 부인을 대신해 그 모든 일을 혼자 해내고 있다.
“담뱃잎을 만지면 끈적끈적해. 더운 여름에 따지, 엮지, 건조장에 나르지, 열 번 이상 손이 가는 일이야.”
1940년생 김대돈씨는 “나는 담배농사를 안지었지만 우리 아버지가 담배농사를 지었다. 우리집 옆에 담배건조장이 있었는데 벽돌을 이용해 3층 높이로 쌓고, 나무에 불을 피워 화기로 말리고는했다. 내가 스무살이 넘어 없어진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건조장은 1950~60년대 무렵 노랑초를 재배하던 시절 담배농가들이 직접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불을 피워 잎을 말려야 노랗게 말려졌다고 한다.
담뱃잎을 묶는 일을 ‘목’짓는다고 한다. 담뱃잎을 목지어서 하얀 끄냥이(전매청에서 공급하는 일종의 끈)로 규격대로 한 포, 두 포씩 포장한다. 이를 ‘하꼬’라고 부른다. 한 포의 무게는 대략23~25kg이다.
담배꺼치(포를짓는나무틀)에 담뱃잎을 네켜까지 쌓은 뒤 나무판으로 누른다. 잘 건조된 담뱃잎은 1등품에서 등외품까지 분류한다. 흠집이 없이 노랗고 길이가 긴것이 최상품이다. 포장된 담뱃잎은 예산연엽초생산조합에 납품한다. 예산연엽초생산조합에 납품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3~4년 전이다.
그전에는 결성, 광천, 홍성에 납품하다가 조합창고가 없어지면서 예산에 납품했다.
최인성씨는 “지역마다 납품하는 날이 다르다. 조합에서 그때가 되면 연락이 온다. 우리는 10월경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납품을 하고 나서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벼농사를 마무리하고 짚을 갈무리해야 했다. 짚은 그 쓰임새에 따라 분류해 놓고는 했다. 초가집 이었던 시절에는 초가지붕을 엮는 용도, 논에 퇴비로 만들어 사용하는 용도, 나머지가 담뱃잎을 엮는 용도로 사용됐다. 지금은 비닐하우스에서 판매 되는 노끈을 사다가 엮는 다고해도 뿌리고, 수확하고, 널어서 말리고, 포장하는 일은 오롯이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 일이다.
지금 애연가들이 피우는 담배에는 거의 수입산 담뱃잎이 들어간다고 한다. 농가에서 생산하는 수확량으로는 담배의 양을 공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담뱃잎이 말라가는 비닐하우스를 지나며 쿰쿰한 담뱃잎 냄새에 주머니속 담뱃갑을 만지작 거린다. 바삭거리는 비닐소리에 담배따는 농부의 거친 숨소리가 겹쳐들리는 듯하다.
[출처] [은하면 학산리 내남마을-사람 사는 이야기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