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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77] 카렌 브릭센 - 커피로 써 내려간 사랑의 서사시(敍事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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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77] 카렌 브릭센 - 커피로 써 내려간 사랑의 서사시(敍事詩 )
  • 홍성신문
  • 승인 2019.12.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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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미 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 미 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우린 소유하는 게 아냐.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지.”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년)는 <관계의 미끄러짐>을 그린 최고의 역작이었다. 그것은 어긋난 존재들을 향한 절절한 애가(哀歌)였다. 잡을 수도, 가질 수도 심지어 깃들일 수조차 없는 존재들을 향한 절절한 서사(敍事), 그것이 바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던 것이다. <내가 아프리카의 노래를 안다면, 아프리카는 나의 노래를 알까>로 대변되는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사람과 사물 사이 깃들임에 대한 통렬하고도 애틋한 기록이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 카렌 브릭센에게 삶은, <소유로 길어올린 자기만의 왕국>이어야 했다. 그것은 <나만의...>란 단어로 이루어진 소유격 일색의 문법책과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 것>이 되어 깃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이란 존재가 그러했다. 고국 덴마크에서 약혼해 케냐로 함께 온 약혼자 브롤에게 그녀가 바란 것은, 케냐에서 시작할 커피 농장을 함께 일구고 함께 가꿔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함께>일 때 온전한 의미가 있었다. 나이로비 언덕에 커피밭을 일구며 그녀는 브롤의 삶이 온전히 커피밭에 깃들이길 꿈꾸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설렘이 없는 비루한 일상일지라도 브롤이 자기곁을 지키며 커피밭을 일궈준다면 세상은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 되어줄 것 같았다.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대상을 향한 열망이 크면 클수록 삶은 더 가혹한 무게로 우리를 위협한다. 브롤은 결코 카렌의 욕망을 채워줄 남자가 아니었다. 농장을 비우며 며칠씩 사냥터로 향하던 브롤은 그녀의 소박한 꿈을 조롱이라도 하듯 매독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며 그녀와의 관계를 위협한다. 브롤과의 간극을 메우며 나타난 남자, 데니스 또한 마찬가지다. 영국 귀족 출신 데니스에겐 카렌이 그토록 꿈꿔온 <온전한 깃들임>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순간적인 깃들임일 뿐이다. 축음기를 들고 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려줄 만큼 감성적인 남자지만 그런 그에게도 <그녀만의> 소유가 되는 일은 진저리치게 피하고픈 숨 막히는 세상인 것이다.

<관계의 미끄러짐>을 그린 이 영화가 빛나는 건 커피를 통해 보여주는시간의 서사 때문이다. 카렌 브릭센이라는실존 인물을 다룬 이 영화는 케냐에서 머문18년이라는 세월을, 시간에 대한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커피나무의 성장을 통해 드러내고 보여준다. 나이로비 응공 언덕에 커피밭을 일구고 묘목을 심고 묘목을 가꾸며꽃이 피고 열매 맺는 장성한 나무가 되기까지, 그리하여 커피체리를 따고 과육을 벗겨그 안에 든 커피 씨앗을 골라 말리고 거두는 그 모든 과정들은, 시간을 말해주는 섬세한 장치가 되어 영화 안에 깃들인다. 커피나무는 7년을 전후로 왕성히 결실되고 20년이 지나면 노화되어 베어진다. 이러한 성장기록들이 영화 곳곳에 삽입되며 시간의 흐름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허리를 굽혀 커피 체리를 따는 첫 수확에서부터 어깨높이로 성장한, 그리고 어른 키를 덮을 만큼자란 3년, 5년, 7년의 커피나무들은 <커피생육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섬세한 장면이되어 영화 곳곳을 장식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실을 통해 비로소 얻어지는 법이다. 그것은 소유격에서 출발하여 목적격을 향해나아가는 문법책과도 닮아있다. 모든 것이내 것이어야만 하는 세상에서 <너의 실존>을 먼저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이란, 상실이라는 고통을 겪지 않고는 결코 얻어질수 없는 통증의 결실인 것이다. 남편도 연인도 떠나고 마침내 목숨처럼 여겼던 커피마저 불타 버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얻게 되는 <소유>와 <향유> 사이, 눈물겨운 삶의 성장 기록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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