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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박종민(수필가·서부농협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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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박종민(수필가·서부농협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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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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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
풋내만 풍기던 국화 향기가 제법이나 노란, 빨간 꽃망울을 터트리면서 코끝을 스쳐 뇌리 속 깊이 퍼질 만큼 진하게 풍겨나니 맑은 공기가 한층 더 상쾌하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가을 아침이다.

흐려져 가는 달빛을 밤새 끌어안고 이고지고 목청 높여 노래 부르며 임을 그리던 귀뚜라미의 애절한 화음도 하얗게 새벽이 열리면서 멎어가고 별들도 하나씩 우유 빛 하늘 속으로 꺼져간다.

검푸른 대지가 엷은 안개 베일을 벗어내며 녹황색으로 물들여지는 포근한 가을 아침, 활동하기에 적당한 쾌적한 기온이 하루의 활기찬 출발을 부추기고 간간히 불어와 뜰 안에 있는 감나무 잎을 드문드문 떨어지게 하는 시원시원한 하늬바람이 지나며 무르 익어가는 열매들을 삭힌다.

여름 내내 제 할 일 모두 다 하고 하나둘씩 떨어져 가는 빛바랜 감잎사귀, 이제는 나락(奈落)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자연 향해 행복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을은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 있어서 소중하고 고귀한 계절이며 감동과 감사를 느끼게 하고 스스로 나를 뒤돌아보며 자신을 다시 한번 매만지게 하는 벅찬 계절임이 틀림없다.

풀도 나무도 가을이 있기에 저렇게 고운 빛깔로 열매 맺고 빛 고운 모습과 달고 시고 매콤한 맛과 향으로 유혹하며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여름날 얄궂은 태풍과 호우가 우리네 삶터를 할퀴고 찢어 멍들게 하여 강산과 논밭에 생채기를 냈다 해도 대자연은 이를 감싸주고 덮어주며 보듬어 안아 평온을 되찾게 하고 번들번들 윤이 나는 풍성한 가을을 엮어내어 힘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구겨지고 쭈그러졌던 욕망을 새로 채워 주며 희망과 용기를 돋궈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늘 하늘에 감사드린다. 언제나 행복한 마음과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생동(生動)하며 삶을 충실히 가꿔가고자 하는 나를 감사드린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힘들고 인심이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말라간다 하더라도 사람 살아감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리라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황금들녘 물들이며 햇살 사그러드는 저녁나절보다는 찬이슬 맑게 풀끝에 어리는 가을아침을 더 좋아한다.

부스스 잠깨 눈 비비고 일어나 창을 열면 과일과 곡식, 들꽃 냄새가 물씬 풍기며 내게로 달려들고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감이며 벙긋 입 벌린 빨간 석류, 길섶에 빨강, 분홍, 흰색이 예쁘게 뒤섞여 핀 코스모스와 산모퉁이 밭두렁에 노랗게 피어난 들국화, 묵은 나뭇잎 쌓인 담장 밑에 애처롭게 피어난 상상화(상사병을 앓다가 죽은 처녀의 넋이 꽃으로 변했다는 꽃), 그 무엇 한 가지도 내 마음을 사로잡기 부족함이 없는 가을꽃과 열매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앞 산 능선 따라 은빛 억새꽃이 찬 이슬 머금고 나풀거리고 있고, 벌써부터 붉게 물든 참빗싸리 나뭇잎이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듯 하며 표현 못할 그리움이 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산과 들에 가득한 충만함에서 느끼는 포만감 뒤에로 밀려드는 사랑을 갈구하는 센치멘탈일까?

봄부터 생명의 움싹을 틔어 긴긴 여름 무더위 장마 모진 바람 겪고 이겨내어 하늘 높고 푸른 이 계절을 기다렸거니! 꽃도 열매도 이 얼마나 장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가을에 피는 꽃과 열매는 사람의 영육(靈肉)을 살찌우는 생명의 원천이며 원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을을 더욱 사랑하고 기뻐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슴 가득 품어야만 한다. 그리고 서로 나누며 행복한 계절을 즐겨 노래 불러야 한다.

가을 이른 아침 창가에로 밀려드는 그리움과 사랑이 있기에 벅찬 감동으로 생을 다시금 음미해 본다.
<독자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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