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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특집> 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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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특집> 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3)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5.0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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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가 독립운동 헌신...홍성군 연구.조명 절실

임시정부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중국과 연락을 담당하기 위해 주화한교선무단(駐華韓僑宣撫團)을 만들었다, 중앙부처와 화북구, 화중구, 화남구 등 지역으로 구분해 구성했는데 이상만은 화중구 단장을 맡았다. 그 뒤 1947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발생하자 이상만은 대만으로 피난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대만에서도 한일 대표단체로 등장한 대만한교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됐으나 얼마 있다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상만은 1949년 3월 그리던 고국 땅을 30년 만에 밟았다. 귀국 후 새롭게 등장한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됐다.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은 이승만 중심의 한국민주당과 더불어 해방정국의 양대 정당이었다.

그러나 1948년 5·10 선거에서 한독당은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해 불참하면서 제헌국회는 이승만 중심의 한민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국한 이상만은 경교장에서 김구와 함께 지냈다.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이상만은 정동감리교회 예배를 드리고 경고장에 돌아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김구를 목격했다. 그 후 거처를 중구 초동 107번지로 옮겨 지내며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차남인 이건식 집에서 지내다 1955년 1월 8일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의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다. 정부는 1963년 이상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립묘지의 이상만 묘비에는 1884년 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후손들이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써놓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과사전 등에는 이상만이 서울 출신으로 기록돼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독립유공자공훈록 등에는 이상만이 홍성 출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이상만은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던 무렵 부인 황씨와 사이에서 난 아들 이건우와 뱃속에 태아(이건식)를 남겨둔 채 홍성을 떠났다.

큰 아들 이건우는 아버지가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로 일할 때 찾아갔다가 광복군이 되었다. 해방이 됐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교민을 위해 잔류를 택해 헌신한 이상만에 대해 고성은 목사는 “성경에 나온대로 자기 양떼를 보호하려는 선한 목자의 발로였다”고 쓰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 김좌진 장군 등 항일 선열들과 함께 2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만 목사에 대한 홍성군의 연구와 조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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