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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와 광복군 회계 책임맡은‘살림꾼’ 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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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와 광복군 회계 책임맡은‘살림꾼’ 홍성출신 임정요인 이상만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4.2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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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특집> 의정원의장 탄핵 주도, 김구와 지내다 암살 목격
▲ 경교장에서 김구와 함께 촬영한 이상만(가운데)

임시의정원 이상만 의원의 활동상은 임시정부 중경시대에 적극적으로 드러났다. 1941년 10월 제 41회 정기총회에서 이상만은 엄항섭, 박찬익, 차리석, 민병길, 양묵 등 6인과 함께 김봉준 임시의정원 의장 탄핵을 발의, 통과시켰다.

1942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에 한국 광복군에 대한 행동준승 9개항 취소를 요구했다. 이상만의 활동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회계책임자다. 1940년 광복군총사령부가 창설될 때 이상만은 총사령부 재정과 출납을 담당하는 주계(主計) 직책의 장교로 임명됐다.

임시정부에서도 회계검사원, 회계 검사관, 회계검사원 검사장 등을 연달아 맡았다. 고성은 광리교회 목사는 이에 대해 “그의 회계 능력이 출중했을 뿐 만 아니라 그만큼 정직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한다.

이상만은 민족주의 계열인 김구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해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3년 5월 중경에서 열린 한국독립당 전당대회 때는 17명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1945년 4차 전당대회에서는 5명의 중앙 감찰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한편 이상만은 이렇게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면서 목회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경에서 남쪽으로 10여 km 떨어진 토교라는 지역에 한인촌이 구성돼 있었고 임시정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토교에 신한교회가 있었는데 목사가 이상만이었다. 교회당은 광복군 50명의 임시 막사로 쓰이기도 하고 이상만 목사 방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인숙처럼 사용됐다.

이 교회에서 광복군 청년 장준하(독립운동가, 사상계 잡지 대표)는 주일학교를 운영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오랜 기다림 속에 해방을 맞자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임정 요인, 목회자로 평생을 사는 이상만은 환국하지 않았다. 중국에 남은 400만 동포들을 보호하며 안전한 귀환이 이루질 때 까지 돕기 위해서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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