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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44>손탁- “꽃같이 피어 매혹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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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 <44>손탁- “꽃같이 피어 매혹케 하다”
  • 홍성신문
  • 승인 2019.04.19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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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미 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꽃같이 피어 매혹케 하라’ 일제 강점기, 광고는 일상의 꽃이었다. 그것은 흑백을 배경으로 핀 꽃처럼 낭만이자 매혹이었다. 국권을 빼앗긴 나라는 더 이상 민초들의 삶을 돌볼 수 없었고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제 이름조차 지키지 못한 채 수탈의 삶을 견뎌야 했다.

그 시절 삶은 흑백의 필름과도 같았다. 누구 하나 기억해주는 이 없는 서민의 일상은광고를 통해 그나마 채집되고 기록됐다. 강철처럼 튼튼한 고무신과 청량음료라 과장된맥주, 그리고 강장제로 포장된 초콜릿은 그시절 유일한 일상의 기록이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란 암흑 위에 핀 낭만이자 매혹이었다.

그리고 거기, 매혹처럼 손탁 여사가 있었다.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온 그녀는 흑백을 배경으로 핀 꽃과도 같았다. 외국어를 모르던 시절, 그녀는 영어와 불어, 독일어와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검은 눈에 흑발을 한 조선의 여인들과 달리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역사의 봄을 기다릴 줄 알았다.

열 일곱과 열 여덟 살, 두 차례에 걸쳐 겪은 전쟁의 기억은, 역사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봄이 올 때까지 숨죽여 기다려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체득한 경험이었다.

자신의 고향 알자스가 프랑스에서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로 넘어가는 동안 그녀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스스로 이방인이 되는 기이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의 삶을 끌어안는 자양분이 되어 격변의 땅, 조선으로 이어졌다.

청과 일본, 러시아에 끼어 요동하는 조선의 현실 앞에서 그녀는 기꺼이 왕의 편이 되어주었다.

궁내부 통역을 담당하며 그녀는 조선의 입과 귀가 되었고 어린 순종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며 고종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한때 고종이 청과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낸 건 모두가 손탁이 일궈낸 친러 정책의 결과였다.

그녀가 커피와 인연을 맺은 건 정동구락부를 통해서였다. 일본을 견제한 공로로 받은 기와집 터에 호텔을 세우며 그녀는 1층 레스토랑에 은은한 커피 향을 피워올렸다.

양탕국이라 불리던 커피는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시대적 울분을 함께 한 사람들은 반일 세력을 규합하며 나라의 앞일을 도모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종을 궐 밖으로 피신시킨 것도, 서구 열강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한 것도, 모두가 커피 향이 흐르던 정동구락부를 통해서였다.

고종에게 손탁은 생명의 고삐와도 같았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고종을 커피로 위로하며 그녀는 암울한 시대의 꽃이 되어갔다. 꽃같이 피어 매혹하는 광고처럼, 그녀의 삶 또한 그러할 듯 보였으나 조선은 끝내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손탁 호텔을 장악하며 그녀는 결국 조선을 떠나야 했다. 베베르 공사를 따라 조선 땅을 밟은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쫓기듯 떠난 그녀의 뒷모습은 처연했으나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봄을 기다릴 줄 안 그녀의 삶은 지지 않는 꽃이 되어 영원한 매혹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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