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성 지역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고 걷기 좋았던 9월의 날들. 청광마을을 들어갈 때마다 뚜벅이 여행자가 된 듯 자유롭게 거닐었습니다. 많은 주민분들이 늘 반갑게 맞아주셨고 집, 마을회관, 논밭, 나무그늘 아래 등 여러 자리에서 편안히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금자동아 옥자동아 보배동아” 이름 예쁜 우리 할매, 이보배 할머니
“할머니, 성함이 너무 예쁘셔요. 누가 그렇게 예쁘게 지어주셨대요?”
“엄마가. 옛날에 우리 엄마는... 그때는 이렇게 병원이 읎으니께, 약도 잘 읎고 허니께는 시 살 먹으면 죽고 니 살 먹으면 죽고 아장아장 걸어대니면 죽더리야. 엄마가 애기를 낳아서 킬 때. 그렇게 해서 열하나를 낳았는디 내가 열하나 째리랴, 내가. 다 낳는 대로 시 살, 두 살, 니 살이면 죽어서 못 키웠는디 우리 오빠허고 나하고 둘을 키웠어. 그랬는디 그렇게 열하나 날 동안 딸은 나 하나 났댜. 그래갖고 이름을 아주 어뜨게 지어야 하나 하다가, 옛날에 둥게둥게 할 적에 노래 부르는 게 있잖아. 금자동아 옥자동아 보배동아, 거기서 이름을 따서 보배라고 진 거여. 구엽대서. 그래서 보배라고 져갖고 어디 가든지, 농협 가도 그러고 어디 가든지 그려. 아이구, 웬 이름이 그렇게 이쁘냐고(웃음).”
이보배(83) 할머니의 예쁜 이름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보배 할머니의 어머니는 귀하디 귀하고 사랑스런 막내딸에게 값진 이름을 선물했던 것이다. 그 이름 덕에 지금도 할머니는 어딜 가든 이름 예쁘단 소리를 듣고 다닌다.
“아유, 안 가봤어. 핵교를 워치게 가. 밥도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살았는디. 왜놈들한테 농사체 다 뺏기고서 밥이나 얻어먹으라고 남의 집을 보냈는디 내가 일을 헐 줄 알으야지. 못허고서 가서 울기만 하다 집으로 왔어. 그랬더니 그렇게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더라고. 가서 밥 얻어먹고 살으라고. 어이구, 그때는 뭐... 없는 집에서 데려갔으니께 그 집은 넉넉하겄어? 그 집도 어렵지. 그런데 가서 살고 이내 신랑도 군인 가서 그렇게 허고. 그러니께 어렵게만 살았어, 연태.”
고향인 광천에서, 부모님 밑에서 귀한 막내딸로 하나 남은 오빠와 함께 농사를 도우며 살아오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농사지을 땅을 뺏기면서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그 후로 남의 집에 들어가 살기도 하다가, 결국은 어린 나이 열여섯 살에 광천 내 옆 마을에 살던 신랑네로 시집을가게 됐다.
“일찍 여워서 열여섯 살에 갔어. 우리 신랑은 스무 살이구. 그런디 동짓달 그믐날 시집 갔는디, 정월 그믐날 군인 갔어. 한 달 살고 갔어. 그때가 어른 네지 뭐 나는 뭐 알아. 암것도 모르지. 신랑 얼굴도 몰렀어. 못 쳐다봤어, 넘부끄러서. 그때는 지끔 사람 같은감? 넘부끄러워가지고.”
할머니는 군 제대하고 일을 찾아 이곳저곳 찾아나선 남편을 따라다니다, 40년 전 이곳 청광마을 다래울로 이사를 오게 됐다. 광산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 마을에 왔었단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광산일은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이 마을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이고, 처음에 오니께 뭇 살 것 같대. 하늘만 뵈지 뭐 뺑뺑 돌아 산이고 하늘만 뵈잖여. 그렁게 아주 답답허고 죽겠더라고. 그런디 그냥 그냥 살으니께 공기 좋고 그러니께 그냥.”
지금은 집 앞에 조그맣게 텃밭을 일구어 가꿔놓고 본인이 먹을 것과 자식들에게 줄 정도로만 작물을 기르고 있다. 옛날에는 더 넓게 농사도 지으면서 남편과 함께 누에치는 일도 크게 했다고 한다. 집 뒤로 있는 산밭에 뽕나무를 심어놓고 지게로 져서 옮기고 먹이고.
“나도 하우스 크게 졌었어. 옛날에 일루 와서 우리 할아배하고 나하고 누에를 많이 쳤어. 여기다 크게 잠실 짓고서 누에 쳐서 그때는 돈 벌었었는디. 저 산밭에다가 다 뽕나무 심어가지구 그렇게 해서 했는디. 지게로 다 져다가, 돈 없응께 경운기도 못 사고 지게로 다 져다가 그걸 맥여서 했는디 중간에 가서... 약 때미 못허겠더라고. 논이다 약덜 했싸면 죽어, 누에가. 약내 나서.”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결혼생활. 군에 간 신랑을 기다린 시간.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남편의 일자리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며 농사, 누에 치는 일 등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시간들만큼이나 할머니 인생을 돌아봤을 때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40년 장사 이야기’다.
“아이고, 고생 숱허게 허고 살았어. 지금들은 자손들이 용돈 주니께 먹고 살지. 나도 계속 누에 칠 때만 집에 있었지, 장에 대니며 돈도 벌고. 장사해서. 장사 40년 했어. 한 30년 넘게 했어. 대천, 홍성, 광천, 청양, 서산, 예산... 안 간 데 없지. 오장 다 따라대녔지. 다섯 장이잖아, 일주일이. 다 따라대녔어. 그렇게 해서.”
이곳 청광마을은 유독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작물을 키워서 팔기도 하고, 직접 상거래를 하면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홍성장, 온양장, 대천장, 서울장, 광천장, 예산장, 청양장 등 거리가 멀든, 가깝든 일주일에 다섯 개 정도의 장터를 전부 다녔다.
“김 장사 많이 했지. 광천김 만드는 디 저기... 대천 은포리라는 데서 김을 만들어, 바다에서 떠다가. 거기서 새벽에, 여기서 3시 되믄 가. 그러면은 막 거기 가면 4시 되믄 일어나서 대문도 하나 안 열어놨지. 투드려서는 깨서 사갖고서, 또 혼자 허는 게 아니라 싯닛이 동업으로 해갖구서 가서 한 잔뜩 사와. 사다 광천 가서 냉겨. 맨드는 데서 싸게 사다가. 냉기고 남으면 이제 소매허고. 김 장사 오래 했어. 그러고 마늘 장사, 고추 장사 안한 거 읎어. 생선 장사도 허고(웃음).”
한창 마을에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여럿이 모여서 팔 물건을 사다가 다 같이 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보배 할머니 또한 그 안에서 함께 장사를 하셨던 거다. 김 장사, 마늘 장사, 고추 장사, 생선 장사 등 할 수 있는 장사는 뭐든 했다고 한다.
“아이고, 고생 숱허게 허고 이 나이 먹었네. 아이고, 아주 지끔은 살기 괜찮은디 늙어서 뭣헌디야(웃음). 늙어서 아무 쓰잘데기 없어, 인저.”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보배 할머니다.
“애덜이 많아도 애덜이 다 가서 잘 살어서. 시집도 잘 가고. 홍성서 둘 살고, 그러고 부천서 시 집 살고, 용인서 한 집 살고, 영등포서 한 집 살고. 그렇게 지끔 칠 남매 다 잘 살어(웃음). 어려운 딸은 읎어. 그렁께 좋아.”
자식들이 전부 다 잘 커주고 현재 다 잘 살고 있다며 이야기하는 지금, 보배 할머니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고생한 세월도 다 잊게 해주는 이런 게 행복이지 않을까.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주란, 문수영)
<대상마을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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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하지 않은 마을, 마을자원 발굴 및 마을책자에 관심이 있는 마을
△연락 : 홍성군 마을만들기 지원센터(041-635-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