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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만해(卍海)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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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만해(卍海)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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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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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중학교 권기복 교장
 

지난 3월 1일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이한 아주 뜻있는 날이었다. 일백년 전, 우리 겨레는 일제의 총칼을 앞세운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한·일 병합 이후 9년 동안 짓밟았으니, 일제는 제대로 약발이 먹혔으리라 믿을만한 상황이었다.

1919년 1월 21일, 비운의 고종 황제가 사망하자 만해 한용운은 여암 최린을 찾아갔다. 최린과는 1908년 동경(일본 도쿄) 방문 때 만나서 친교를 맺게 되었다. 당시 최린은 황실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생 연합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만해보다 한 살 위여서 금방 친구로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여보게, 여암! 용운이네.”
“오, 만해! 자네가 무슨 걸음인가? 어서 들어오게.”
“내가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는가?”
“왜 모르겠는가!”
“언제가 좋겠는가?”
“고종 인산일이 3월 3일이니, 그 날이 어떻겠나?”
“인산 행사가 그르칠 수 있으니, 3월 1일이 좋을 듯싶으이.”
“그렇게 함세!”

최린은 빙긋이 웃으면서 한용운을 반가이 맞아 들였다. 그 후부터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하고, 천도교 보성사 인쇄실에서 각종 유인물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최린은 손병희 천도교 3대 교주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천도교 내의 중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거사의 뜻을 함께 할 인사들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정치나 경제, 사회활동 등에서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전주이씨 황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분담하여 전국을 누비며 지도자들을 포섭하였지만, 신통치 못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억눌린 상태였기에 사후의 상황에 대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주이씨 황손들이 손사래를 쳤고, 서울 중심의 기독교가 불참하였으며, 불교계도 꽁꽁 숨어버렸다. 심지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도 서명에는 불참하였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참하겠다고 서명한 사람은 33인에 불과했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에서 최린의 진행과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연설로 그 불꽃이 피어올랐다. 한반도를 순식간에 태워버릴 것만 같았던 산불, 그 산불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갔고, 동해와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번져나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빠지지 않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일찍이 재개정된 헌법 전문마다 자구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진정 우리 민족의 대운동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자연 산불처럼 일어난 것도 아닌데, 100년 역사 밖에 되지 않은 이 운동의 주역이 누구인지 우리 후손들 중에 그 누가 알고 있는가?

‘3·1만세운동’의 주역은 단연 한용운과 최린이다. 그러나 최린은 차후에 변절하여 매국의 선봉에 선 자이기에 받들기에 정말 불편하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과 역경에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킨 한용운까지 매도당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죽음을 불사한 유관순의 독립정신을 단 한 푼도 폄하하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 더 대우하여 모신다고 해도 박수를 보내겠다.

다만 ‘3·1만세운동’의 적극 가담자인 유관순이 거사를 만들어낸 주동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하겠는가? 필자는 8년 전에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뮤지컬로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필자가 ‘문화예술로 불씨를 살리면, 학문적 연구가 뒤를 잇고 정치적 노력이 결실을 맺지 않을까!’ 하였다.

지난 여하정 앞 뜰 행사장에서 우리 군수님과 군의회 의장님의 말씀은 한용운을 비롯하여 우리 지역의 선조들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개괄적인 내용이었고, 지역구 국회의원님은 여러 가지 바로잡기 제안을 내놓으셨는데, 그 중에 하나 유관순님의 독립지사 등급을 올리게 되었다는 말씀은 있었지만 한용운에 대한 제안은 전혀 없었다.

해마다 군청사업으로 만해 한용운의 ‘고유제’도 모시고, 여러 가지 행사를 도모하고 있다. 필자는 묻고 싶다. 창씨개명에 반발하여 배급 하나 받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영면하신 분께서 기름진 제사상을 원하실까? 만해 한용운이 왜 독립 운동가인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이니까. 그 33인 중 지금도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의 불씨를 되살리고, 평생 그 불씨를 보듬으셨던 분! 스님이 되어 활동하신 것도, <님의 침묵>을 내어 시인이 되신 것도 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길이지 않았는가! 지금 만해는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는 것으로 여겨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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