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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인물 연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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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인물 연구<하>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8.12.11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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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저자
남구만은 홍성사람이다
▲ 서후적 산소와 묘비.(구항면 지정리 덕은동 소재)

남구만의 증조할아버지 남타 산소와 옛 집터

앞서 소개한 구항면지 홍제연의 글에는, “남구만의 증조부 남타가 1638년에 결성의 전장에서 아들 남식에게 봉양을 받다가 이듬해 별세하니 홍주의 고남(高南) 목과동(木瓜洞)에 장례를 지냈다”고 했다.

홍주의 고남 목과동은, 현재 홍성군 갈산면 와리 지역이다. 갈산면 와리 오리골에는 남타가 살았다는 옛집터와 집 주변 대나무 밭이 있다. 또한 오리골 안쪽으로 깊숙하게 자리 잡은 산죽골에는 남타 산소가 현존하고 있다.

남구만의 증조부와 증조모 산소는 합장한 상태이다. 남구만의 증조부인 남타 산소는 옛날부터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남구만 증조모 산소는 경기도 이천에 있다가 최근에 이곳으로 이장해 와서 합장하였다. 남구만 증조모 산소를 이장해 올 때, 산소 앞에 세워놓았던 옛 묘비도 그대로 옮겨와서 산소 앞에 세워놓았다. 현재 합장한 산소 양쪽에 남구만의 증조부와 증조묘비가 각각 서있다. 두 분 산소의 묘비는 모두 남구만이 직접 짓고 글씨도 직접 썼다.

▲ 서주 묘비(구항면 지정리 덕은동 소재)

남구만의 외가마을 구항

약천 남구만은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덕은동마을에 터전을 잡았던 연산서씨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연산서씨 집안은 남구만 아버지의 외가이다. 연산서씨는 남구만에게 진외가 집안인 것이다.

연산서씨 7세손인 서주(徐澍)의 셋째 딸은 의령 남씨 집안인 남식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딸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남일성에게서 낳은 외아들이 약천 남구만이다. 연산서씨 서주의 셋째 딸인 서씨 부인은 약천 남구만의 친할머니다.

보개산 기슭인 구항면 지정리 덕은동에는 연산서씨 7세손인 서주(徐澍) 산소가 있다. 서주는 남구만의 외증조 할아버지이며, 서주 산소 앞에 서있는 비문은 남구만이 직접 지었다. 또한 덕은동에는 서주의 아들인 서후적 산소도 있다. 이 비문도 남구만이 직접 짓고 썼다.

이처럼 남구만이 연산서씨 선조의 비문을 지은 것은 진외가 집안이라는 인연 때문일 것이다.

▲ 약천초당.(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 소재)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에 전해오는 남구만 탄생 전설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 마을은 보개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거북이마을을 내려다보는 보개산 기슭 감투봉은 남구만의 탄생과 관련된 지명이다.

옛날에 내현리 보개산 봉우리에서 산불이 났었다. 그런데 산불의 방향이 참으로 신기했다.

대개 산불은 바람을 타고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주변을 태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상하게도 보개산 산불은 거꾸로 산꼭대기 봉우리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산불의 기세가 너무도 강렬하여 사람들은 접근할 수도 없고 속수무책이었다. 자연적으로 산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산 아래 마을에서는 젊은 산모가 산기를 느끼며 아기 낳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산모가 아기 낳기를 기다리는 집은 마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여 산불이 내려오는 길목이었다. 산불은 마을을 집어삼킬 기세로 타내려오며 산모가 있는 집 주변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산불이 산모가 있는 집 바로 위쪽까지 타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응애, 응애….”
집안에서 사내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나오고 있었다. 산통을 느끼며 신음하던 산모가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참으로 신기한 일이 생겨났다. 마을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산불이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스르르 꺼지는 것이었다. 산불은 사내아이가 태어난 집 바로 위쪽에서 스스로 꺼지면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암시하는 산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남구만이다. 산불이 발생했던 마을 뒷산 봉우리는 사내아이가 나중에 훌륭한 감투를 쓸 것이라고 믿으며 ‘감투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정헌, ‘남산과 보개산의 솔바람길 이야기’에서 옮겨옴)

이상의 전설과 방증자료 등을 바탕으로, 거북이마을에는 남구만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온다. 거북이 마을에는 남구만과 관련한 약천초당과 시비 등이 있다.

▲ 보개산 감투봉 모습.

홍성(결성)은 남구만의 고향

고향(故鄕)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두 가지가 있다.
이상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남구만의 고향은 홍성(결성)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남구만이 홍성에서 태어났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묘지명에 나타난 것처럼 열 살 무렵까지 결성에서 살다가 상경했으며, 관직에 진출한 이후로도 수시로 결성에 와서 지냈던 기록이 여러 곳에 전해온다. 또한 조상 대대로 선조들이 결성에서 살아온 옛 집터와 선대 산소가 전해온다.
더욱이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에도, 자신의 결성이 고향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약천집 제29권에 “조설(釣說, 낚시이야기)”의 도입부에는,

“歲庚戌余歸田潔城. 家後有池. 縱廣數十武. 而深淺六七尺以下. 余長夏無事. 輒往見噞喁之….”
로 시작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해석해보면,

“경술년(1670, 현종11)에 내가 고향인 결성(潔城)으로 돌아오니, 집 뒤에 작은 못이 있었는바 넓이가 수십 보이고 깊이가 6, 7척이 못 되었는데, 나는 긴 여름날에 할 일이 없으면 번번이 가서 물고기들이 입을 뻐끔거리며 떼 지어 노는 것을 구경하곤 하였다….” (신영산, ‘고전 더 읽기’에서 옮겨옴)
이처럼 남구만의 글에도 자신의 고향이 결성이라고 표현해놓고 있다.

이상의 많은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남구만의 고향은 홍성이고 홍성사람이라고 표현해도 틀리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구만의 산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산 1-5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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