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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19>/ 말러-사랑으로 추출한 고전 음악의 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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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19>/ 말러-사랑으로 추출한 고전 음악의 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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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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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 권미림<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커피는 찰나의 향연이다. 혀뿌리를 적시며 입 안 가득 피어오르고 나면 커피의 감각은 끝이 난다. 커피의 영혼이라 할 향기 또한 찰나에 머물기는 마찬가지다. 찰나의 감각들이 모여 누군가의 기억 속엔 길게, 누군가의 기억 속엔 짧게, 울림이 되어 남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커피는 음악을 닮았다. 선율을 통해 나오는 무형의 음악은 찰나의 감각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순간을 넘어 영원으로 기억하는 건 오롯이 듣는 자의 몫인 것이다.

커피가 음악과 상통하는 건 또 있다. 입문자를 위한 달달함에서 시고 떫고 씁쓸한 원숙미에 이르는 일련의 테이스팅 과정은 가볍고 경쾌한 ‘모짜르트’에서 무겁고 난해한 ‘말러’ 로 이행하는 고전 음악의 감상 단계를 닮아 있다. 커피의 정점에 에스프레소가 있다면 음악의 정점엔 말러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러야말로 고전 음악의 에스프레소요, 클래식 세계의 룽고인 셈이다.

말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베니스에서 죽다’ 라는 영화 때문일 것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물의 도시 베니스, 휴양 차 찾아온 중년의 작곡가와 천진한 미소년의 매혹... 무엇보다 흑백 영화의 미장센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 영화는 말러 교향곡 제 5번 4악장을 전면에 등장시켜 영화의 아련함을 더했다. 어쩌자고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작곡했단 말인가. 세상의 추함을 모조리 덮어버릴 것 같은 4악장의 울림은 선율이 끝나고 나면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을 것 같은 기묘한 환상을 선사한다.

말러는 실제로 커피를 좋아했다. 일어나마자마 그는 벨을 눌러 조리사를 깨웠고 우유와 버터, 빵, 그리고 금방 갈아 만든 커피로 식사를 마쳤다. 커피에 넣을 우유는 알코올 난로에 데웠는데 그는 종종 불을 지피는 과정에서 손을 데곤 했다. 정신을 딴 데 두기 때문이었다. 먹고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통 작곡에만 몰두한 그는 아내 알마조차 접근을 불허할 만큼 격리된 공간을 중시했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삶은 그러나 알마가 있어 더욱 빛났을 것이다. 한때 화가 클림트의 연인이었고 클림트의 그림 ‘키스’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알마는 말러에게 있어 불멸의 연인과도 같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는 교향곡 제5번 4악장을 작곡했고 그로 인해 그는 알마 뿐 아니라 클래식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사랑이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커피 한 잔의 온기와 불멸의 음악. 그 둘 사이 어디쯤에 우리의 사랑은 있는 걸까.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며 이 가을, 사랑의 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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