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5:36 (목)
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예산군 삽교읍 신리 수암산 오형제 바위
상태바
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예산군 삽교읍 신리 수암산 오형제 바위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7.09.18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위가 된 아버지 원한 갚고 죽은 다섯 아들
▲ 수암산 오형제바위.

우리고장 예산군 삽교읍 신리, 수암산 정상 등산로 부근에 오형제 바위가 있다. 수암산은 용봉산과 이어지는 줄기인데, 조선시대에는 용봉산과 수암산을 모두 합쳐서 팔봉산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홍성 쪽 산줄기는 용봉산이 되었고 덕산 쪽 산줄기는 수암산이 되었다. 용봉산과 수암산은 일제가 갈라놓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오형제바위는 용봉산과 수암산 경계부근에서 수암산 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오형제바위를 설명하는 전설 안내판의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형제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조정에서 바른말을 하다가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그 자리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떠난 후에 이곳에 남겨진 오형제는 살길이 막막했다. 하는 수 없이 10년을 기약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장남은 자기 집이 내려다보이는 수암산에 초막을 짓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누명 씌워 죽인 원수의 첩이 되어 돌아왔다. 장남은 흩어진지 8년 만에 형제들에게 연락하였다. 오형제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고 관헌의 눈을 피해 장남의 초막으로 피했다. 그러나 이미 관헌들이 오형제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므로 스스로 자결 하였다.

▲ 오형제 바위 전설 안내판.

관헌들은 오형제가 죽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는 순간, 억수같은 비가 오므로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한참 후에 주위가 조용해지고 고개를 들어보니 초막과 오형제의 시체는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곳에 오형제를 닮은 다섯 개 바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죽은 다섯 아들의 넋이 바위가 되었다고 하여, 사람들은 오형제 바위라 불렀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오형제가 바위가 되는 순간 구렁이로 변했다. 강 둑 아래에서 천하게 살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전설을 읽으면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우리 주변에 부모나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잃는 전설들은 많이 전해온다. 대부분 전설들이 원수를 갚은 후에 목숨을 잃고 바위나 무생물 등으로 환생한다는 이야기들이다. 특히 여성들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 죽게 되거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위험에 처하게 되면 스르로 자결하며 자신의 정절을 지킨다.

오형제바위처럼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떠난 부인이 오히려 원수의 첩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우리 주변의 전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 전설은 전승되는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수암산에서 내려다 본 내포신도시.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우리의 정신문화를 왜곡하거나 격하시킨 이야기들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오형제바위 전설 역시도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전승되어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오형제 바위 전설은 원형을 되찾아서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전설의 내용이 허구라고 하여도, 우리 선조 여인들이 목숨처럼 지키고 살았던 정절을 훼손시켜서는 안될 일이다. 원수의 첩이 되고 구렁이로 살아온 아내의 불명예를 씻어줘야 할 것이다.

오형제 바위 전설은 일제에 의해 팔봉산의 이름이 두동간난 것처럼, 우리의 숭고한 정신문화가 심하게 왜곡되고 훼손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