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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김미경<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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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김미경<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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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1.0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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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팅(Rebooting) 대한민국

▲ 김미경<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16년 12월 30일 비행기를 탔다. 연말과 새해를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기 위해서 베트남으로 왔다. 태국이나 캄보디아 보다 훨씬 나와 맞는 것 같다. 베트남은 남녀관계가 보수적이라 숙박을 위해서는 결혼을 증명해야 한다고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동남아 국가처럼 늙은 서양인과 어린 동남아 아가씨의 오붓한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아마도 공산국가의 보수성이 자본의 힘을 여전히 억누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본의 탐욕이 가치화될 때 모든 것은 상품이 된다.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한다. 돈과 연관 지어지면 질수록, 돈에 종속될 뿐이다. 돈을 목적으로 인간은 수단시 된다. 파도가 칠 때 마다 무거운 돌은 밑으로 깔리고 가벼운 모래는 더 위로 밀려올라가듯, 돈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그 차이는 커지게 마련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부자와 빈자간의 격차는 더 커진다.

자본의 부작용을 인정하든 안하든 현실은 눈앞에 와 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와 성공한 사람들은 가난으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그 개인의 게으른 탓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부는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부모의 뒷받침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과 혼자서 서야 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정신과 육체의 액면가가 다르다. 다른 출발선상에서 달리는데 어떻게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일부가 성공해서 중산층의 대열에 서 있다고 하더라고 파도가 칠 때 마다 불안한 버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불안한 버티기가 피곤하게 느껴질 때,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가난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가난 앞에 무슨 자존심이 있고 정의가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태생적 불평등의 키워드인 수저계급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만의 일이 아닌 듯 미국의 시민들은 양극화의 문제의식을 대통령 선거에서 기이한 선택으로 표출하였고, 중국에는 `샤오캉(小康, 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개념이 등장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 일부가 먼저 잘살게 된 뒤 이를 확산한다)’이 `균부론(均富論)'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부가 일정부분 균등하게 배분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이 조정될 필요가 있다. 헤비급이 경량급과 싸우게 된다면, 헤비급에게는 비대칭적인 규제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헤비급과 헤비급들이 연대하고 경량급이 낄 자리가 없게 만들어 헤비급의 자손들만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면, 그리고 헤비급과 친구가 되어야만 링 안에 싸울 기회를 갖는다면, 경량급에게 닥칠 상대적 박탈감은 희망의 미래를 걷어가 버리는 것이다. 열심히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서 버둥거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기력과 분노만 남을 것이다. 2017에는 게임의 상식과 정의가 힘을 주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가난을 극복했고, 민주를 얻었다. 탐욕의 이름으로 이지메당한 대통령은 부엉이를 미워했고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아 썩은 강가에서 테니스를 치는 개발의 신화에 속기도 했다. 그래서 여성은 최소한 바른 원칙은 지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허망한 허깨비 놀음으로 더 이상 실망할 여백도 없다. 누가 대신 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새롭게 태어난 시민의 주인의식을 갖고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자부심 가득한 대한민국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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