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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홍성 동학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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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홍성 동학농민전쟁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6.11.24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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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전투가 동학농민혁명 실패 분수령

‘전봉준투쟁단’이 제2의 동학혁명을 일으킨다며 홍성을 통과, 농기계상경 투쟁을 벌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파탄 국면에 한일군사비밀보호협정이 전격적으로 체결되자 120년 전 외세를 배격했던 동학농민전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이에 홍성지역에서 벌이진 동학농민전쟁사를 되돌아본다.

▲ 고 김갑현 씨가 소장했던 장곡지역 동학농민군 작전도와 헌곡 수납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전주에서 전봉준의 봉기로 시작돼 전라도와 충청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차 농민전쟁은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충남서부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동학군은 태안군 원, 이북, 소원, 근흥, 안면에서 기포해 태안 본영에 집결, 음력 10월 1일 혁명의 깃발을 올렸다. 그러나 홍주목사 이승우의 관군 수천명과 일본군 300명의 기습 공격을 받아 참패했다. 농민군은 15일 다시 모여 대오를 정비해 행군을 시작했다. 23일 관군 500명과 일본군 400명이 다시 기습 공격했으나 수가 많은 농민군이 승리했다. 25일 면천에서 하루 묶고 덕산-신례원에서 이승우군과 또 접전을 벌였으나 농민군이 승리했다. 예산군수가 도망가고 농민군은 큰 저항없이 예산을 접수해 군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농민군의 목적은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 뒤에 홍주목사 이승우를 남겨두고 갈 경우 후환이 걱정이었다. 농민군은 발을 돌려 홍주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1894년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25일) 오후 4시 박인호 휘하 농민군이 홍성읍 덕산가도 왼쪽 고지를 점령 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홍주향교 뒤까지 나가 진을 치다 패퇴, 홍주성 안으로 물러났다. 이때 홍주향교를 지키던 서재생 오경근 최민지 박세웅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 7명이 살해됐다.

일본군을 지휘하던 소위 적송단봉(赤松團封)의 전황보고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제2·제4분대를 동문과 북문 중간에, 또 서문 전방 빙고치, 북문 좌편에 각각 한 부대씩 배치하고 결전을 대비했다. 홍주성을 포위한 농민군은 3~4일 동안 낮에는 성문을 부수고 진입을 시도하고 밤에는 짚단을 성밑에 쌓아놓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관군은 성문밖 민가에 불을 놓고 안에서는 진격하는 농민군에게 대포로 공격했다. 29일 오후 5시경 농민군이 대패하고 서산 해미쪽으로 달아났다.

홍성에서 3만 명 희생

홍주전투를 이끌었던 박인호는 서산의 이창구, 예산의 이군자 등 지도자를 잃고 삽교로 피신했다. 홍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가려던 농민군은 홍주성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홍주전투의 치열했던 참상은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10일 뒤 관군을 이끌고 입성한 이두황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동학군들이 머물었던 곳이 수리(數里)에 걸쳐 지푸라기와 풀섭들이 널려있고 불에 탄 흔적이 있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동학군 수만 명이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에 패하여 100여 명이 전사했다. 동학인의 집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사람들이 개천가에 널려있는 시체를 찾는 광경은 참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도교의 <갑오동학농민전 기록> 제 11권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동학군이)홍주를 점령하면 충청도 전체는 물론 경성을 일격에 파할 가능성이 있다. 각 군에 주둔한 동학군이 모여 홍주성을 포위 사방에 진을 치고 천지를 진동 기세가 심대하였다. 그러나 홍주성곽이 원래 견고하고 병기가 충분해 오천, 예산에 비할바가 아니다. 수만의 결사대를 조직해 공략하였는데 동학군의 대실책이었다. 의기와 용기가 있으나 군중이 어찌 관군의 총탄을 당하리오. 일시에 사상자가 수천에 달하고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사망자는 약 3만여 명 이었다. 홍주참패는 동학당의 치명상이오 무모의 소치였다. 만약 홍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밖에서 4~5일 만 더 유하며 관군을 차단했다면 성중에 내란이 일어나 자연 도락하였을 것이다. 역사상 일대 유한이다. 홍주성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관군과 일군이 기세를 올려 목천, 온양, 신창, 해미, 서산, 공주, 논산이 패하고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체포되니 동학도들은 다 달아났다. 태안에서 학살된 자 7000명, 홍주 가타 지역 전사 혹은 학살된 자를 합치면 충남일대 희생자가 약 7만여 명이었다’

일본 <오사카아사회>신문은 1894년 12월 16일자 기사에서 홍주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온 김재현이 농민군의 수를 6만 명이라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김도행 역사교사의 논문, 홍주향토문화연구회가 만든 자료에는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돼 있다.

“120년 후 다시 일본군 한반도 진출?”

2013년 일본 아까스까 아끼라(中塚 明) 오사까 나료우 여대 명예교수가 대표 집필로 일본에서 출판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 병사의 일지를 증빙자료로 활용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시고꾸현 후비병 제19대대 2중대에 배속돼 홍주전투에 참가한 1등 군조(하사관)가 형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지역신문에 소개했다.

‘(홍주)농민군이 동·서·북 방면에서 진격해 오는데 400m까지 왔을 때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돼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 토착민들로 공포에 떨고 있었고 전진할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다. 이날 실탄 3100발을 소비했다’

장곡면 고 김갑현(1994년 사망) 향토사학자는 장곡지역에서 교인들로부터 봄과 가을 헌곡(獻穀)을 받아 동학교를 운영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자료 헌곡 수납부와 작전도를 보관하고 있다가 본지에 전해주었다.

동학농민전쟁은 조선왕조의 부패가 극심해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농민의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명성황후 민비는 청나라와 일본군을 끌어들여 무참히 살육하고 끝내 자신도 일본군에 의해 희생당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주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을 밀어붙였다. 반대자들은 동학농민전쟁을 떠올리며 일본에게 한반도 진출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일군사문제는 협정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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