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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의달 특별기획 연재①/ 1950년 여름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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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의달 특별기획 연재①/ 1950년 여름 홍성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6.06.09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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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서울입성 환영 방송’안 믿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북한에 300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며 끝난지 66년이 됐다. 한국전쟁은 비전투 민간인의 희생이 군인보다 많았다는 점에서 세계 전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쟁이라고 한다. 6월 원호의 달을 맞아 홍성 사람들은 6·25를 어떻게 겪었으며 민간인은 어떻게 얼마나 희생됐나 정리해본다. 2개월 예정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홍성서 6·25전쟁 겪은 6명 1987년 증언

1987년 5월 16일 낮 12시 홍주성 안에 있던 홍성문화원에서 6·25전쟁을 겪은 군내 인사 6명을 초청, 좌담회를 열었다. 장경환(광천·당시 72세), 이복규(광천·71세), 박용세(결성·68세). 이창우(홍동·74세), 이항직(홍성·66세), 조성국(52세) 이었다. 김양수(36세) 혜전대 교수가 사회를 보고 필자가 기록을 맡았다. 홍성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홍주소식’에 보훈의 달 특집을 꾸미기 위한 기획 좌담회였다. 그날 참석자 9명 중 황규철 문화원장과 필자 외에 7명은 29년이 지난 현재 고인이 됐다. 이날 좌담회 내용은 1987년 6월 ‘홍주소식’에 수록됐으나 누락된 부분도 있는 등으로 낡은 취재노트를 꺼내 분야별로 다시 정리한다.

【황규철】 북한 인민군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난지도 벌서 37년 됐습니다. 전국 이야기는 많으나 지역 이야기가 없어서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당시 겪으신 이야기 특히 숨겨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양수】 홍성의 개전 당시. 피난, 적 치하, 학살, 퇴로 상황 등으로 구분해 목격담을 말씀해 주세요. 먼저 1950년 6월 25일 어디서, 어떻게 맞이했나 한 마디씩 부탁드립니다.

【이창우】 홍성군청에 근무하는데 6월 25일 아침 비상이 걸렸어요. 3~4일 지나 인민군이 들어와 집에 있는데 군청에서 나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보니 이하영 홍성군인민위원장이 군수 자리에 앉았더군요. 위원장은 뒤에 전명재가 이어받았죠. 군청 직원들은 대부분 안 나왔고 내 책상도 없어졌습니다. 저 보고 농협 창고 인수하라며 손바닥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통행증이죠. 홍성읍내를 돌아다녀봤어요. 시내가 텅 비고 보초만 보이는데 어찌 무서운지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박용세】 결성면사무소에 근무중 24일 출장갔는데 25일 아침 비상소집 연락이 왔습니다. 면사무소에 가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데 38선이 터졌다는 겁니다. 오후 4시 라디오에서 북한방송이 나오더라구요. 용감무쌍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와 대대적인 시민 환영을 받는다는 겁니다.
면장에게 보고했더니 직원들이 그럴리 없다고 믿지 않아요. 조금 있으니까 생필품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다음날 서울서 학생들이 내려와 전쟁 발발이 확인됐죠. 며칠 후 베잠뱅이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면사무소를 접수했습니다. 면직원이 12명인데 인민위원회로 교체되면서 3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직원들은 안 나왔는데 저는 끌려나왔어요. 재정계 일을 맡았었거든요. 실권자는 면장과 서기장이었고 그 다음 재정계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홍성유지들 시국대책위 꾸려

【장경환】 결성에서 방위군 3지대장으로 있으며 계통기구를 통해 전쟁을 보고받았습니다. 대한청년단이 모두 방위군에 참여했습니다. 예산에 나가 적군과 싸웠습니다. 병력으로나 화기로나 열세라서 후퇴해 홍동을 거쳐 광천으로 갔습니다. 상리 고개에서 장교인 이범주, 박만두, 노재형을 만났어요. 술과 닭을 잡아놓고 일전을 각오하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 안 될 것 같아 하산을 권유했는데 안 듣더라구요. 그날밤 광천이 떨어질 것 같아 산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지서로 전화했더니 “동무 누구야”하는 겁니다. 그 길로 대천으로 갔습니다.

【이복규】 저는 광천에서 약방을 하는데 24일 서울로 약을 사러갔습니다. 수원을 지나니까 무장한 군인들이 보여요. 영등포에 가니까 차장이 이게 최종 열차라고 해요. 서울역에 내리니 비가 오는데 동대문 밖으로 부식 싣고 가는 트럭들이 보였습니다. 여관에서 자고 25일 새벽 라디오에서 전쟁이 났다는 뉴스를 들었어요. 날이 밝자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오더라구요. 미아리쪽에서는 총소리도 들렸고. 밤 열두시 방송국이 점령당했다고 해요. 걸어서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한강 다리가 끊어졌다는 겁니다. 마포쪽으로 가서 뗏목을 타고 한강을 건넜어요. 수원까지 걷다 기차를 만나 기차 지붕 위에 올라타고 내려왔습니다.

【이항직】 저는 홍성 인쇄회사에 근무하며 대한청년단 재정부장이었습니다. 25일 아침 거래처 손님과 홍북에 갔다가 삽교쪽에서 사이랜 소리가 들려 돌아와 경찰서에 가봤습니다. 경찰관이 정문에서 착검하고 서 있어요. 38선 터졌다는 겁니다. 회사 직원들 집에 보내고 경찰서로 가서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홍성의 유지가 총 망라한 민간기구였죠. 경찰서장은 박헌규, 군수는 박수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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