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9:11 (월)
그 사람을 만나다/ 장곡면 해방둥이모임
상태바
그 사람을 만나다/ 장곡면 해방둥이모임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5.01.29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완의 광복 … “인생은 칠십부터다”

 
지난달 22일 낮 12시. 장곡면 도산리 생미식당에 1945년에 태어난 장곡 해방둥이들이 모였다. 가나다 순으로 다음 사람들이다.

김만중(광성리), 김소진(신동), 김용태(오성), 박종노(신풍), 윤상모(상송), 윤영기(도산), 윤용호(상송), 임종대(오성), 정기영(대현), 정인영(대현), 정재경(도산), 황선원(도산). 매월 부부 동반으로 모이는데 이날은 부인 회원이 5명만 참석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다. 윤용관 군의회 부의장 형 윤용호 씨는 홍성군 씨름 선수였고, 정인형 씨는 정상진 홍성사회경제네트워크 대표 아버지다.

3년간 선배 노릇하다 들켜

김만중 씨가 말했다.

“오래 전, 경상도 사투리 쓰는 낯선 사람이 우리 동네 지하수 파러 왔는데 옆 사람이 그러는 거야. 나보다 세 살 더 먹었다구, 3년 동안 깍듯이 선배 대접해줬지. 그런데 예비군 훈련장에서 시험 보는데 날 보구 연필 좀 빌려달래. 겻눈질로 봤더니 글쎄 46년생이잖아. 이런 싹바가지 없는 놈. 그래서 혼내줬지. 야 인마 너 왜 나이 속였어, 알고 보니 저놈이 사실은 해방둥이 동갑내기더라구”

기자가 김소진 씨에게 물었다. 경상도 어디서 왔나? 어떻게 장곡 산골까지 와서 살게 됐나?

“경상북도 문경 사람인데 여기 와서 산 지 올해로 34년째 됩니다. 일 다니다 보니까 장곡 오서산 밑 물이 좋아서…”

박종노 씨가 말을 가로채고 황선원 씨가 거들었다.

“기자님, 저 자식 말예요. 문경에서 도둑질하다 들켜서 여기까지 도망 나온 거라구요”

“쟤요. 고추농사 실패해서 망하구 일루 왔다구요”

모두 한 마디씩 하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자기 모임 회장님인데 이렇게 막 말하는 분위기는 모두 동갑내기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겹살 불판을 끄고 공기밥까지 다 먹자 김소진 회장이 일어나 인사말을 하며 회의가 시작됐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라고 신문 텔레비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홍성군에서 해방둥이 모임은 우리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해 25년째 모이는데 이렇게 오래 모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요, 우리가 태어난 시대는 조국이 해방되던 해였죠. 우리는 6·25 전쟁을 비롯해 역사적인 일도 많이 겪었고 힘든 가난 속에서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했습니다. 여기까지 온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생활 기반도 잡았고 남은 여생 부부가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삽시다.”

마을일 도맡는 이장 5명

임종대 총무가 유인물을 돌리며 2014년도 사업 및 회계 보고를 했다. 사업과 회계는 간단했다. 남해안으로 1박2일 관광갔던 게 제일 크고 회원 병 문안 1건, 상가집 조화 2건이 전부였다. 지출 총액이 394만6000원이고 이월 잔액이 468만 원이다.

장곡 해방둥이 모임은 윤영기 씨가 장곡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제안하며 주선해 시작됐다. 회의록에 기록된 시작 날자가 1991년 1월 26일이니까 만 24년을 넘긴 것이다. 처음엔 매월 모이다 격월로, 최근엔 분기별로 모인다. 처음 21명이 모였으나 지금 12명 남았다. 3명이 사망하고 이사 가거나 그냥 탈퇴한 사람도 있다. 그냥 탈퇴한 이유가 재밌다. 후배들과 같이 모일 수 없다는 것이었단다.

같은 1945년생인데 학교 선·후배가 있고 생일이 빠른 사람, 늦은 사람이 있다. 생일을 묻자 몇 명이 앞 사람과 삿대질하며 큰 소리를 교환했다.

“야, 너 서릿배지?”

“아냐, 인마 맛배야”

상반기에 태어난 사람은 맛배, 여름 이후 태어난 사람은 서릿배로 부르고 있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날 때 철에 따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이날 참석자 중 김소진 씨 생일이 1월 15일로 가장 빠르고 정인영 씨가 9월로 가장 늦다. 김진호 씨가 장곡초 33회 졸업생으로 가장 선배고 임종대, 김용태 씨는 35회로 2년 후배다.

한 회원이 농담을 던졌다.

“기자님 이건 꼭 써 주세요. 우린 해방되던 해 태어났지만 일본놈들 설칠 때 부모님이 맹글어줬다구요. 곡식 낱알까지 세가며 세금 바치고 징용 안 끌려가려고 도망다니다 우릴 맹글었다구요. 그래서 잘 된 사람 없어요.”

이들은 해 짧은 겨울 점심을 건너띄며 오서산에 올라가 땔 나무하며 자랐다. 저녁먹고 마을 넓은 사랑방에 모여 새끼를 꼬거나 화투를 치며 이웃과 어울려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김소진 씨와 윤상모 씨는 월남전 백마부대에서 월맹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모두 평생 오서산 밑에서 농사만 지었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며 인격을 형성시킨 것은 그냥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그 마을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박종로 씨는 20년간 이장으로 마을 일을 도맡아 했다. 김만중, 정인영 씨도 이장을 오래 했고 정기영, 윤상모 씨는 아직도 이장을 보는 마을 리더이다.

남은 소망은 통일

바라는 소망 한 가지씩 부탁했다. 정기영 씨가 말했다.

“아들녀석이 승용차 한 대 사 보냈더라구요. 트럭 타고 다니는 일 좀 그만 하고 이제 승용차 타고 놀러 다니라고. 모두 논밭에서 일하느라 엎어져있는데 나만 승용차 타고 왔다갔다하라고? 말이 안 되지. 우린 일 안 하면 못 살아요. 일 안 하면 몸이 쑤셔”

남북통일 이야기도 나왔다. 말 잘 하는 김만중 씨가 정리했다.

“해방 70주년인데 그때부터 남북이 분단됐으니 이게 참 걸린다구. 우리 죽기 전에 통일 좀 봤으면 더 큰 소망이 없겠시다. 통일은 뒤에 하더라도 북쪽 지하자원 남쪽으로 오고 남쪽에 남는 농산물 북쪽으로 가며, 싸우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두 시간 쯤 정담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서로 건강을 확인 한 후 마당에 나가 기념사진을 찍으며 모임을 정리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함께 주먹을 쥐며 구호를 외쳤다.

“내 나이가 어때서? 인생은 칠십부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