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5:36 (목)
의사총
상태바
의사총
  • 류재중
  • 승인 2001.08.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설
"친일 후손들과 주객이 전도되어 살아온 유족들은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늦었지만 그나마 홍주의사총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위안이 됩니다." 안선영(청양읍 읍내리) 홍주의병 유족회장의 홍주의사총 국가문화재 승격 지정에 대한 소감의 말이다. 장의남 문화재 담당은 "의병들의 후손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슴속의 한이라는 이중고가 있었다"며 "이를 계기로 한이 풀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17일 홍주의사총을 도지정문화재(73년 12월 24일)에서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431호로 승격 지정했다. 이에따라 홍주의사총은 임진왜란 의병의 유해를 모신 금산의 칠백의총(국가지정기념물 제105호, 63년 지정)과 정유재란 의병을 모신 만인의총(사적 제272호 81년 지정)같은 수준으로 기리고 그 위상을 되찾게 됐다.

일명 구백의총으로 불리는 홍주의사총은 1905년 을사박탈조약이 체결되자 그 다음해 전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1200여명의 의병이 봉기하여 5월 19일 홍주성을 되찾았다. 이후 5월 31일 홍주성을 지키던 의병들은 서울과 공주에서 지원나온 일본 군대와 경찰의 총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의병들은 물러설 줄 모르고 싸우다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성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의병들과 주민들은 일본군에게 무차별 사살돼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홍성읍 남산공원 부근과 홍성천 변에는 버려진 의병들의 시신이 모두 부패하여 뼈만 나뒹글게 되었다. 이렇게 40여년의 세월 동안 방치되다 49년 경찰공무원들이 주변의 야산에 나무를 심기위해 우연히 그 당시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홍주성 주변에 묻힌 유해를 수습하여 매봉재 기슭 현 위치에 합창하고 구백의총이라 불렀다.

지난 71년 신광철 홍성군수가 창의사를 짓기 시작해 그 다음에 완공하고 매년 5월 30일 제향을 이어오고 있다. 이후 81년 문화재관리국이 현지조사를 하고 유족회 등이 성역화 사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85년 조광휘 군수는 전임군수가 진행하던 진입로 공사를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성역화 사업에 첫발을 옮겼다.

한편 이상선 군수는 지난 91년 관선군수 시절 성역화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현재까지 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99년 7월 21일 국가문화재로의 승격 지정을 건의해 지난달 10일 문화재청의 심의를 통과하고 17일 관보에 고시됐다. 군청 문화재 담당과 문화재청 기념물과에 따르면 홍주의병실록을 비롯 매천야록, 홍양일기, 홍양기사, 독립기념관의 사료와 역사학자 18명의 논문 등 2년여에 걸친 자료 보완과 심사를 거쳐 이번에 국가문화재로 승격지정됐다.

기념물과 한 관계자는 "성역화 사업 등에 따른 국고지원이 약간 늘어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위상만큼은 최고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의남 문화재 담당은 "홍주의사총은 앞으로 성숙된 주인의식 속에 주민 전체가 관리해야 된다"고 말했다. 김대일 홍성보훈지청장은 "홍성은 항일했던 역사적 인물과 의병 등 고귀한 정신문화 유산이 매우 많다"며 "지역의 역사 문화재들을 답사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