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5:36 (목)
충남도청 80년을 본다③/ 대전이전 발표되자 공주면민들 큰 충격
상태바
충남도청 80년을 본다③/ 대전이전 발표되자 공주면민들 큰 충격
  • guest
  • 승인 2012.10.22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주공영회·공주시민회 등 조직적인 반대운동

충남도 우희창 미디어센터장이 각종 기록물과 간접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충남도청 이전 역사’를 연재한다. 이 글은 충남도청 홈페이지 ‘충남넷’에도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주>

▲ 1931년대 공주의 전경.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주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도청 이전에 대한 총독부 발표 직후인 1월 20일 공주군 장기면 신관리 주민들이 유진순(劉鎭淳) 지사에게 보낸 진정서 내용을 보면 당시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진정서에는 “존경하는 지사각하. 다름이 아니라 금번 도청이전 사건으로 주민 생활이 구렁텅이로 떨어져 말이 아닙니다. 지사 각하께서 특별히 사정을 보아주셔서 많은 생명을 구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울며 기원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사실 도청 이전이 공식 발표되기 이전부터 도청 이전설이 있었던 만큼 공주의 주민들은 공주공영회(公州共榮會), 공주시민회(公州市民會) 등을 조직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도청이전이 구체화되는 움직임 속에서 1930년 11월 10일 공주 주민들은 공주시민회를 재조직하고 회장으로 마루야마 도라노스케(丸山虎之助)를, 공주 면협의원인 오경달(吳慶達)을 부회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진정위원 선출 도·총독부 의회에 진정

아울러 마루야마와 함께 공주면장 고바야시 소타로(小林增太郞), 도평의원 미야모토 겐키치(宮本善吉) 등을 진정위원으로 선출했다. 진정인들은 충청남도, 총독부, 제국의회에 도청이전 반대의 뜻을 진정했다.

공주 유림들도 따로 진정서를 1931년 1월 3일 총독부에 제출했다. 권병훈(權丙勳), 유갑수(柳甲秀), 이석(李錫) 등 3명은 진정서를 통해 “도청이 이전하면 유림의 잔명을 보존할 길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들 100여명은 도지사 관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31년 1월 13일 총독부가 충남도청 이전 사실을 공표하자 공주는 이전반대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공주대 역사학과 지수걸 교수에 따르면 “공주에서는 총독부와 도쿄에 진정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시민대회를 열고 시장 상인들의 철시, 공주면 주변 면민들의 진정 등의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반대운동의 압권은 마루야마 회장 등이 도쿄로 건너가 제국의회 중의원들을 대상으로 도청이전 예산안 삭감을 설득한 일이다. 변평섭은 그의 저서에서 이 때 도쿄로 건너간 일행은 마루야마와 공주의용소방대 김영배(金英培)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라키라는 웅변을 잘하는 중의원의 도움을 받아 예산안을 삭감을 관철했다고 한다.

반면, 향토사학자 김영한씨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공식적인 자료를 보면 마루야마 일행이 도쿄로 간 것은 맞지만 마루야마와 도평의원이었던 미야모토를 제외하고는 일행이 더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 갔는지도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총독부 공표 전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반대운동 펼쳐

김영한씨는 “이 때 당시 도쿄에서 박춘금(朴春琴)이라고 하는 조선인 중의원이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박춘금은 주먹출신 정치깡패로 청년시절 술집에서 일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출세한 직업적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의 모습(현 공주사대부고). 정문 옆에 경찰서가 있다.
제국의회서 이전예산 전액 삭감

이러한 활동으로 그해 2월 18일 제59차 제국의회(중의원)에서 충남도청 이전안은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공주와 대전 입장이 극과 극으로 엇갈린 가운데, 총독부는 예산 복원을 위해 긴급 충남도평의회를 소집했다.  이때 고바야시는 공주면장으로써 당연히 공주군수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지만, 출장허가 없이 신병치료를 핑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3월 11일 공주로 돌아온 고바야시 면장은 △도청이전 반대운동에 참여한 일 △허가 없이 여행한 일 △총독부 방침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일 등으로 면직처분을 받았다. 현직 공무원이 허가없이 일본까지 건너가 반대운동을 펼쳤던 이 사건은 당시 공주의 반발이 얼마나 셌고 절박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처분은 적당한 후임자가 없고, 공주면의 갱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곧바로 취소되긴 했다.

공주면민 횃불시위·투석전 벌여

도평의회를 소집한 총독부는 귀족원에 제출할 건의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이 건의문에는 도청의 이전은 △도세의 진전상 불가피 △도민의 복리증진 △총독이 선정을 베풀고 있음에도 공주면민은 허구·기만의 반대이유를 들어 제국회의 의원들을 현혹 △도청이전이 불발에 그치는 경우 총독정치의 위신 실추 등의 내용을 적고 있다.  중의원에서의 예산안 전액 삭감에 대한 기쁨도 잠시, 이렇듯 귀족원에서 예산이 복원될 조짐을 보이자 공주면민들은 3월 11일부터 횃불시위, 투석전 등 산발적인 시위를 감행해 50여명이 구금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쩔 수 없는 법. 귀족원은 1931년 3월 13일 제국회의의 결의를 무시하고 총독부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에 걸친 도청이전 반대운동은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 공주 주민들이 도청이전 반대 운동을 하다 구금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귀족원 총독부안 채택…반대운동 힘 잃어 

이후 도청이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그해 7월 발생한 수해로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전국에 내린 폭우는 유례없이 큰 것으로 충남에서만 37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독부는 민심이반을 우려해 각 도에 수해복구사업을 독려했다. 긴축 예산 때문에 복구할 자금이 부족하자 불요불급한 사업은 모두 중단하고 복구사업에 투입하라고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이제 공주의 관심은 도청 이전에 따른 보상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있었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 총회에서 시민회 대표들은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와 ‘국비로 시설해 주어야 할 7가지’에 대해 총독부로부터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보고하고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요구 3가지’를 결의했다.

금강교 가설 등 보상 요구 …대전과 반목


우여곡절을 겪은 도청이전은 그해 10월까지 모두 이뤄졌지만 공주사람들의 응어리진 감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대전 사람들은 공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김영한씨는 “대전과 공주는 극심한 개인적인 반목까지도 했었다”면서 “그 때 당시 공주 사람들은 ‘대전 놈들’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충남의 심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던 古都 공주. 그 전통을 지키려 했던 처절한 투쟁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숱한 어려움을 뚫고 대전으로 이전한 그 도청은 8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해 새로운 100년을 맞으려 하고 있다.

<우희창 미디어센터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