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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협회 충남지부장 박임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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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협회 충남지부장 박임선 씨
  • 안현경 기자
  • 승인 2011.08.12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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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이름 야스쿠니서 빼주세요”

66번째 맞는 8·15광복절이다. 하지만 지난 달 일본 도쿄재판소에서 열렸던 ‘생존자 야스쿠니신사 합사폐지 소송 패소’에서도 볼 수 있듯 청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재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아프게 한다. 광천에 사는 박임선 씨(80세)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충남지부장이자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 원고로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돼 전사한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지우기 위해 20여 년을 싸워왔다. 지난 10일 늦은 오후, 박임선 씨가 사는 집을 찾아가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1932년 청양군 운곡면에서 태어났다. 크고 훤칠했던 아비는 신식교육을 받고 일제 때 군청에서 일했다. 딸만 둘인 집에 장녀였는데 아비를 닮아 동무들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아비가 학교를 보내줬다. 할아버지는 아비에게 화로를 던지며 여자애가 무슨 교육이냐며 나무랐다. 그래도 아비 덕분에 학교교육을 받은 유일한 여자아이가 됐다.

그런 아비가 해방 3년 전 징집됐다. 4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끌려간 곳은 남태평양에 있는 나우루 도라고 했다. 해방이 되자 어미는 명주옷을 새로 만들어 놓고 개 짖는 소리만 나면 집 밖을 나가 보았다. 이듬해 7월 18일, 함께 끌려갔던 분이 돌아와 전한 건 아비의 죽음이었다. 군량이 끊겨 호박 등으로 연명하다 식중독에 걸려 사망했다고 했다. 전사통지는 일절 받지 못했다. 동료들이 수습했던 유골은 일본에 압수됐다가 1947년 1월에야 받았다. 어미는 수절 과부로 지냈고 애비 없는 설움 사무쳐가며 자랐다. 어미의 손은 마를 날이 없었고 딸에게도 근면을 가르쳤다. 추운 날에 가마솥 근처에서 젖은 손을 말리고 있으면 손 마르기 전에 얼른 다른 일 하라고 타박을 했다.

열아홉 살에 외삼촌 소개로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경찰서에서 사무보조를 보았다. 그런데 전쟁이 났다고 했다. 2~3일을 쉴 새 없이 걸어 안양까지 갔다. 밭에 난 감자를 생으로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요행히 청양으로 내려가는 화물차를 얻어 탔다. 청양에 내렸을 때는 화물차 매연으로 얼굴이며 온몸이 시꺼멓게 뒤덮여 있었다. 그렇게 어미와 아홉 살 아래 여동생과 전쟁을 났다.

스물한 살에 남편을 만나 광천으로 시집을 오게 됐다. 남편은 배운 사람이었지만 군대를 기피해 공직에는 나설 수 없었다. 동생이 이런 예쁜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없을까 봐 군대 안 간 거라고 귀띔했다. 대신 30여 년 동안 동네이장을 맡았다. 마을의 대소사가 집안일이 되니 아내는 더욱 부지런해야 했다. 누엣장을 열 장씩 하고, 초등학교 바로 뒤에 살면서도 아이들 운동회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5남매를 키웠다.

20여 년 전,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협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비의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에 올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남편에게 아비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서울을 드나들며 사람들을 만났고 역사를 공부했다. 800여 명의 충남도 회원들 대표인 충남도지부장이 됐다. 남편은 읍사무소서 필요한 서류를 복사해 가며 거들었다. 그런 남편도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함께 살던 어미도 8년 전에 떠났다.

2006년에는 일본서 야스쿠니 신사 합사 소송에 참석했다. 하지만 소송대상이 일본국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라며 기각됐다. 다시 소송을 준비했다. 지난달 21일 일본도쿄지방재판소는 종교적 자유를 들먹이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증인석에 섰는데 일본 측이 신사에 이름이 올라 있는데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어왔다. 화가 났다. 대뜸 그게 왜 궁금하냐고 따져 물었다. 판사가 진정하고 앉으라고 했다. 재판정에서 내 목소리가 가장 컸다. 떳떳했고 두려울 게 없었으니까.

다시 변호사들과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 끝까지 가봐야지. 하지만 예전처럼 글을 잘 읽을 수 없고 귀도 많이 먹었다.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40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1명 남았다. 그래도 아비 이름만은, 생각만 해도 욕이 나오는 그 신사에서 이름을 지우고 싶다.

사람은 사적으로는 한없이 겸손하고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9년에 지리산으로 가던 버스가 교통사고가 나서 팔이 부러졌었다. 지금도 그래서 팔 길이가 다르다. 하지만 차를 몰고 다니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그때 버스기사의 죄를 눈 감아줬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사람이 암으로 죽었기에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병사했으면 얼마나 미안했을까 하며. 하지만 공적으로라면 다르다. 원리원칙이 무너지면 큰 소리를 내야 한다. 군청이든, 정부든, 일본이든. 지금도 누구보다 큰 소리로 따질 자신이 있다. 일본에 빼앗긴 아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게 이번 정권이 아니라면 다음 정권에서, 이 문제를 다뤄줄 것을 요청할 것이다.

▲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임선 씨의 젊었을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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