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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개 봉우리 파내자 가세가 점점 기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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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개 봉우리 파내자 가세가 점점 기울어 …
  • 홍성신문
  • 승인 2009.04.06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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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의 숨겨진 이야기/ 갈산면 오두리 ‘장진개’

▲ 장진개 전경.
우리고장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두리는 마을형상이 자라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노루목·사혜·원오두 등 세 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특히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간척사업을 하면서 마을 주변 대부분은 논으로 변해있다.

▲ 부잣집 부근 전경.
오두리에 전해오는 마을 곳곳의 지명들도 대부분 바다와 관련이 있다. 원오두에는 ‘유항구’와 ‘원머리당’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유항구는 옛날에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항구를 통해 들어와 정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항구를 ‘유광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원머리당은 자라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조그만 동산인데, 신당이 있던 곳을 말한다. 지금은 신당 터와 수백년된 팽나무가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두리의 오두마을로 들어가려면 사혜마을을 지나야 한다. 사혜마을에는 아담한 동산 하나가 있는데, 산이름이 ‘장진개’이다. 장진개라는 지명도 바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에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장진개 바로 앞으로 사혜마을 회관이 서있는데, 마을회관 옆쪽에는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주인내외는 젊은시절에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불렸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부잣집의 재산이 늘어나는 만큼 집앞 장진개 봉우리도 해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자내외는 열심히 일했고, 장진개 봉우리가 높아지는 것과 함께 재산도 늘어갔다. 부잣집의 살림이 넉넉해지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고, 남편은 인심이 후하여 방문객들을 성의껏 대접했다.

부잣집 사랑방에 방문객들이 넘쳐나는 만큼 부엌에서는 찾아오는 손님들 음식 장만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특히 부인은 부엌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고 손에서는 물기가 마를 겨를이 없었다.

참다못한 부인은 남편에게 손님 초청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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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잣집 부인이 파냈다는 장진개 정상 부근 모습.
“여보, 하루에도 수없이 술상을 차려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제발 손님 초청 좀 자제하세요. 내 손 좀 한번 보세요”하며 여러 번 화도 내보고 사정도 해봤다. 하지만 인심 좋은 남편의 성격 탓에 방문객들은 오히려 더욱 많았다. 부인의 불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늘어갔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는 것에 싫증이 났다.

어느날 부잣집에 노스님이 찾아왔다. 부인은 노스님에게 시주를 듬뿍하면서,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스님, 어떻게 하면 제 손에 물기 좀 마를 수가 있을까요?”

부인은 노스님에게 집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노스님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대답했다. 앞산 장진개 봉우리에 올라가서 이마부분을 멍석만큼만 파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손에 물기가 금방 마를 것이라고 말했다.

부인은 즉시 일꾼을 사서 장진개 봉우리로 올라갔다. 일꾼들과 함께 장진개 이마부분을 파내기 시작했다.

어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진개 봉우리를 한참 파내자 땅속에서 학 한 마리가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그후로 부잣집은 찾아오던 손님이 뚝 끊기고 가세도 점점 기울기 시작했으며, 우환과 변고가 잦아지면서 망하고 말았다. 또한 해마다 조금씩 높아지던 장진개 봉우리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장진개 봉우리에 움푹 들어간 자국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을 할아버지들이 젊었을 때는 장진개 봉우리의 푹 패인 자리에 숨어서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옛 집터와 장진개의 움푹한 자리가 옛날 부자의 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고장에서 이와 비슷한 전설은 결성면 성남리 중리마을에 있는 ‘누에머리’산에도 전해지고 있다.

▲ 꾀꼴바위.
한편 장진개 맞은편에도 비슷한 높이의 동산이 하나 있다. 산 이름이 없는 조그만 야산인데, 산 중턱에는 ‘꾀꼴바위’라고 하는 예쁘장한 바위가 하나 있다.

옛날에 꾀꼴 바위를 마을의 전씨 성을 가진 집에서 신성하게 섬겼다. 전씨네는 집안에 특별한 일이나 우환이 있으면 꾀꼴바위 앞에서 떡을 해놓고 소원을 빌었다. 마을에서 장난기 심한 젊은이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가끔씩 떡을 빼앗아 먹었다.

젊은이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갈 때 “이놈의 바위야, 떡먹고 싶지 않으냐?”고 소리치며 작대기로 꾀꼴바위를 신나게 때려댔다. 이상하게도 나무꾼들이 꾀꼴바위를 때리고 나면 전씨 집에 아픈 식구가 생겼다. 그때마다 전씨네는 꾀꼴 바위로 달려와서 떡을 해놓고 빌었다. 나무꾼들은 산에 숨어 있다가 꾀꼴바위 앞에 놓고 내려간 떡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곤 했다. 오두리에 살던 80대 할아버지들의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장진개와 꾀꼴 바위이다.

김정헌<동화작가, 금당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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