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장비나 안전장치 없이 일 해와
홍성을 비롯한 충남지역의 석면광산업의 시작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전후 일제는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석면광산 개발을 위한 조사를 실행해 충남 서북부 지역에 많은 양의 석면이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 본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에는 석면의 채취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1970년대 경제개발과 새마을 사업으로 석면사용이 증가하면서 다시 석면의 생산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돼 1984년까지 연간 1만 톤이 생산됐다.
은하면 야동마을에 사는 정조훈(62) 씨도 과거 70년대에 광산에서 일을 했었다. 정 씨는 “아침에 출근하면 어김없이 애국가를 부른 후 조회를 했으며, 조회가 끝나면 광산 직원이 인부들에게 일거리를 분담해 줬다”고 말했다. 정 씨도 다른 마을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굶주리고 배고픈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광산에서 일을 했다. 당시 석면광산에서 일하는 것은 생계유지의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누구도 석면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근로자들은 마스크, 보호장비는 물론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석면을 채취했다.
광천읍 상정리 석면광산은 한 때 10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했던 일제 강점기 아시아 최대의 석면광산으로, 1984년 폐광될 때까지 국내 백석면 생산량의 90%인 19만여 톤을 생산한 것으로 집계됐다.
은하면 덕실리 구동마을에 사는 김종권(86) 씨는 1938년 15세부터 총 24년간 광산에서 일을 했다. 그는 매일 6km가 넘는 길을 다니며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파 작업을 했다. 생계유지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한 댓가는 그가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당시의 월급봉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 씨는의 아들 김상선 씨는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실 때마다 머리, 옷 할 것 없이 전부 새하얀 석면가루가 묻어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