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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깜박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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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깜박 잊었네'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교감)
  • 승인 2008.02.19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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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명이 뒤죽박죽인 이유

날씨가 추워지면서 가까운 분들의 집안에 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갈 때마다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장례식 분위기가 각양각색임을 실감할 때가 있다.

이승에서 주어진 삶을 거의 채우고 돌아가신 분의 경우도 있고, 한창 나이에 어린 자식과 젊은 부인을 남겨 두고 때 이르게 저승으로 가는 망자도 있다. 더러는 품안에 자식을 너무 일찍 저승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어서, 어린 자식을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부모의 애끊는 슬픔을 대할 때는,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아프다.
왜 저승으로 가는 순서는 이처럼 뒤죽박죽일까? 나이 순서대로 저승으로 차례차례로 불러 가면 안 될까?
문득 옛날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까마득한 옛날에 염라대왕은 인간의 수명을 남자는 70세, 여자는 80세로 정했다. 이런 내용을 적어서 자신의 최측근은 최판관에게 명령했고, 최판관은 인간차사인 강임에게 전했고, 강임은 다시 저승과 인간세상을 들락거리는 까마귀에게 시켰다.

까마귀는 염라대왕의 명령이 적힌 쪽지를 입에 물고 인간세상으로 날아왔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쉬지 않고 날아오다 보니 몹시 지치고 배도 고팠다. 허기를 채우려고 땅위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푸줏간에서 커다란 말을 잡고 있었다.

‘옳지, 잘됐구나. 저기 가서 고기 부스러기라도 좀 얻어먹고 가야겠다.’

까마귀는 살며시 내려가서 푸줏간 옆의 나무꼭대기에 앉았다. 정신없이 말을 잡던 푸줏간 사람들은 나무꼭대기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발견했다.

“에이, 재수 없는 까마귀야. 썩 없어지지 못할까.”

푸줏간 사람들은 돌을 집어던지며 까마귀를 쫓아냈다.

까마귀는 겁이 나서 멀찍이 달아났다. 푸줏간의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다시 나무꼭대기로 살짝 날아와 앉았다. 까마귀를 발견한 사람들은 또 돌을 던지며 쫓았다. 푸줏간 사람들과 까마귀는 두 번 세 번 쫓고 쫓기는 일을 반복했다.

“쳇! 인심도 참으로 사납구나. 안 먹는다, 안 먹어! 퉤! 퉤!”

까마귀는 화가 나서 챔을 퉤퉤 뱉으며 멀리 날아갔다. 그런데 그만 입을 벌려 소리치는 바람에 꼭 물고 있던 쪽지가 팔랑팔랑 땅 아래로 내려앉고 말았다. 때마침 땅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뱀이 쪽지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까마귀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입에 물고 있던 쪽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푸줏간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에 속이 상해서 쪽지 생각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날아가다가 쪽지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정신이 번쩍 났다.

“아이구머니나! 큰일 났네!”

까마귀는 부랴부랴 푸줏간 쪽으로 정신없이 되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쪽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까마귀는 때마침 푸줏간 주변을 맴돌고 있던 새매가 의심스러웠다.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쪽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새매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까마귀와 새매는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된통 큰 싸움만 하고 헤어졌다.

까마귀는 참으로 난감했다. 쪽지의 내용에 관해 듣긴 했는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대로 인간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날아다녔다.

“어른 올 때 아이도 오고, 아이 올 때 어른도 오시오.”

“남자 올 때 여자도 오고, 여자 올 때 남자도 오시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구분 말고 아무 때나 되는대로 오시오.”

시간이 흐른 후에, 저승에 있던 염라대왕은 깜짝 놀랐다.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나이 순서대로 저승으로 오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염라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최판관은 강임 차사에게 확인했고, 강임 차사는 까마귀에게 확인했다. 강임 차사의 서슬 퍼런 심문 앞에서 까마귀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자백했다. 결국 인간의 수명이 뒤죽박죽된 원인은 까마귀가 심부름을 엉터리로 한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쪽지 때문에 싸웠던 새매와 까마귀도 앙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인간의 수명이 적힌 쪽지를 물고 간 뱀은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의 슬픔을 생각하며 떠올려본 옛날이야기 한편이었다.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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