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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장수 부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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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장수 부자 이야기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교감)
  • 승인 2007.11.22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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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에서 결성은 홍성을 대표할만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고장이다. 결성 동헌과 향교 등을 비롯한 유·무형의 문화유적과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뿌리 깊은 고장이며 자존심도 매우 강한 곳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결성은, 크고 작은 시련을 숱하게 겪은 고장이기도 하다. 해변 가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유로 인해서 왜구 등을 비롯한 외침의 시련을 제일 앞에서 겪었다. 결성이 겪은 또 하나의 큰 시련은, 조선시대 후기에 결성현이라는 행정구역 자체가 없어지는 사건이었다.
1773년 (영조 21년) 2월에 결성현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죄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결성현을 없애고 보령현으로 귀속시킨 일이 있었다. 3년 후인 1776년에 결성현으로 다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삼강오륜을 중요시 여겼던 당시대에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결성 농요농사박물관장인 황성창씨와 결성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중에, 결성현 시절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황성창씨는 결성지역에 전해지는 두 가지 설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하나는 짚신장수 부자(父子)에 관한 내용이었다.
옛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삼은 짚신은 인기가 좋아서 시장에 내놓는 대로 잘 팔렸다. 아들의 짚신은 인기가 없고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짚신을 삼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비결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상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돈 앞에서는 부모자식간이라도 이처럼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좋은 짚신을 삼는 비결에 관해 또다시 물었다. 물론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화가 난 아들은 짚신 삼는 기구로 아버지를 때려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 비슷한 말로 “골, 털, 골, 털…….”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에 죽으면서 좋은 짚신을 삼는 비결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도대체 “골, 털, 골, 털…….”의 뜻이 무얼까? 아들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해답을 찾아내었다. 짚신은 가느다란 새끼를 꼬아서 짚으로 엮으면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새끼와 새끼 사이에 골이 생기고, 짚으로 엮은 곳곳에 거친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새끼 사이의 골을 잘 만들고 짚으로 엮은 거친 부분을 깨끗하게 다듬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삼은 짚신은 마무리가 깨끗하고 예쁘게 잘 다듬어져서 상품가치가 좋았기에 잘 팔렸던 것이다.
이런 얘기는 필자도 어려서 익히 들었던 내용이다. 무심코 들어 넘겼던 짚신장수 얘기가, 바로 이웃 결성지역과 관련 있었다는 사실에 느끼는 감회가 새로웠다.

또 다른 하나는, 거지 부자(父子)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거지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먹을 것을 얻어가지고 아버지와 함께 먹으려고 갖고 왔다. 아들은 얻어온 음식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다시 음식을 얻으러 갔다. 아들이 음식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더니, 맡겨놓은 음식을 아버지가 모두 먹어치우고 없었다. 화가 난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상이 1773년 2월에 발생했던 두 가지 설이다. 이야기의 진위는 300여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갔고 구전으로만 전해지기에 확인할 길이 없다.
황성창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 부자의 성씨와 아들의 이름이 결성읍지 등에 기록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성씨가 성씨 사전에서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로 당시 사회를 뒤흔들어놓았던 큰 사건이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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