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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은 고암을 욕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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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은 고암을 욕되게 하지 말라"
  • 한관우 기자
  • 승인 2007.05.21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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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화백 조카 이목세 옹 특별인터뷰

 

고암 이응노 화백의 조카인 이목세(80)옹은 최근 고암의 출생지와 관련된 논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홍성신문과 특별인터뷰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암의 연보에는 ‘1904년 음력 1월 12일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부친 이근상과 모친 김해 김 씨의 5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하다’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33년 10월 11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이응노 전주개인전 기사에 ‘본적을 충남 홍성(洪城)에 두고 방금 전주 팔달정(八達町)에서 개척사(開拓社)라는 미술 간판업을 경영하는 청년화가 이응노(30)군의 개인전람회를 오는 11월 12일 전주공회당에서~’라는 기사에서도 출신지를 홍성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때는 고암이 제공한 자료가 분명한 만큼 본인도 ‘홍성’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고암이 호적에 등재돼 낙상리 24번지를 출생지로 기록한 1938년보다 무려 5년이 앞선 시기에 고암 본인이 밝힌 기록이기 때문에 확실성을 더한다. 따라서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으로 가기위해 도강증명을 위해 호적을 정리했을 것으로 설명하는 이묵세 옹의 증언이나 고암의 연보(1935~1938)와도 일치하고 있다. 1938년에 호적이 정리된 사연이 기록이나 증언에 의해 밝혀진 셈이다. 다음은 고암의 출생지가 홍성이 확실하다는 이 옹의 인터뷰 증언내용이다.


“당시 중리에는 우리집안이 대가족이었어. 둘째 형님이 나보다 다섯 살 위(1923년 생)인데 중리에서 출생하셨어. 그런데 1904년생인 고암 이응노 화백이 예산에서 출생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지. 대가족을 분가하기 위해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의 집은 1925년에 조부(이응노 부친)께서 지었어. 그리고 내가 1928년에 그곳에서 태어낫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첫 예산출신 출생자란 말이야. 그런데 1904년에 출생하신 고암 이응노 화백이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로 기록된 것은 나중에 호적을 만들 때 그냥 기록한 것에 불과하지 어떠한 정황으로도 사실이 아니야. 1904년 당시에는 우리 집안 누구도 예산엔 근거가 없었어. 1910년에 한일합방에 분개해 자결하신 증조부(근주)의 유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는데 홍성경찰서에서 통지한 당시 주소가 중리(홍북면 중계리)로 기록돼 있는 점만 봐도 그렇고. 당시엔 홍성에 산 것이 맞아. 작은 아버지인 고암의 출생지는 홍성이지 예산이 아니야” 이 옹은 이 대목에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응노 개인전 기사가 실린 1933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

그리고 1938년에 호적을 정리하면서 낙상리 24번지로 기록된 것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당시엔 정확한 호적도 없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1938년이면 고암 이응노 화백은 전주에 계실 때이고 전주에서 일본으로 가게 돼 있어. 그런데 당시에는 일본을 가려면 ‘도항증명’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비한 호적을 정리하다 보니까 낙상리 24번지로 그냥 기록한 것에 불과 해. 당시엔 홍성에 근거지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고는 출생지를 낙상리 24번지라고 넣을 이유가 없어. 나도 1941년 고암의 초청으로 동경에 유학해서 고암 밑에서 3년을 살았어. 도강증명을 위해 호적에 출생기록이 없거나 기록이 필요하니까 호적을 만들면서 당시 식구들이 사는 곳이 낙상리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 기록만 가지고 출생지를 예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더 이상 고암 이응노 화백의 출생지를 가지고 왜곡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며 출생지 논란으로 “예산군은 고암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소모적인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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