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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애국․계몽운동의 상징인 호명(湖明)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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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애국․계몽운동의 상징인 호명(湖明)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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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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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湖明) 학교’ 뿌리 찾기(2)
김좌진의 어린시절 행동들을 살펴보면, 기질적으로 호방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통 큰 성격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의 파격적인 결정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 10월에 홍주향토문화회에서 주관한 ‘백야 김좌진장군 재조명 학술세미나’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발표되었다. 이 발표에 의하면, 1905년경에 김좌진의 집에서 부리던 여자 종 한명이 천주교에 몰입했었다고 한다. 어느날 천주교도 50여명이 몰려와서 여자 종을 내어놓으라고 했다. 김좌진이 대답하기를,
“너희들의 요구는 마땅하나 외국세력을 빙자해서 요구한다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김좌진은 자기 집의 종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김좌진이 이처럼 개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사상적인 배경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김좌진이 개화사상과 민족의식을 형성한 배경에는, 몇몇 주변 인물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김광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광호는 시국을 읽을 줄 알고, 학식과 덕망이 풍부한 한학자였다. 젊은 김좌진은 김광호로부터 의병활동과 독립협회 등 시국에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문헌에는 김석범(金錫範)이라는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김석범은 김광호의 조카인데, 당시에 단발을 하고 다닐 정도로 개화사상에 깊이 몰두해있던 젊은이였다. 김광호는 독립협회 활동에도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로부터 시국에 관한 얘기들을 밤새도록 관심 있게 들을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서당 훈장이었던 김동익으로부터도 계몽사상을 수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좌진이 민족의식을 형성하면서, 행동반경을 서울 쪽으로 넓힌 것은 1907년부터인 것으로 추측된다.
‘백야 김좌진장군 재조명 학술세미나’에서, 조규태(보훈처 연구관)씨는 김좌진이 호명학교 설립에 관여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발표했다.
김좌진은 서울로 올라가서 1907년에 이봉창이 사회적 사업의 하나로 세운 고아원의 총무로 할동하였고, 얼마 뒤에는 한성신보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개화사상에 더욱 몰입하면서 단발을 하였다. 1907년 11월에 조직된 대한협회에 참여하였고, 대한협회 계통의 인사들이 주축되어 설립한 기호흥학회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 홍주지회를 만드는데 간여했으며, 1909년 말 경에는 대한협회 홍주지회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이처럼 기호흥학회와 대한협회홍주지회를 설립하고 활동하면서 홍주지역의 개화운동가 및 유지들과 함께 호서교육회를 설립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907년에 충남 홍주군 갈산면 상촌리 525번지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한, 전참판 김병익 ․ 전참판 김병수 ․ 전군수 김병학 ․ 현군수 윤필 등과도 교유하였다. 김좌진이 호명학교의 학감으로 활동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이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일부이다.

김좌진의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면, 1908년 무렵에 비밀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1년 3월경에 일경에 체포되어 5월 17일에 경성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1911년 8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3년 9월 경에 출옥하여 고향 홍성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해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홍성헌병대에 10개월 수감되기도 했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좌진은 호명학교에서 오랜 기간 활동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편 홍성지역 교육계 원로이신 이건엽 옹은 호명학교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호명학교는 1907년 3월에 개교했으며, 당시에 백야장군의 나이는 18세였다. 호명학교 건물은 집안 어른인 김병학(김좌진의 종조부)의 집이었다. 김병학은 자신이 거주하던 집 전체를 호명학교 건물로 내주고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학교의 명칭도 호명학교(湖明學校)→명덕학교(明德學校)→구학교(舊學校)로 변했다.
호명학교는 설립 당시의 이름이고, 명덕학교는 후에 강습소역할을 하며 바꿔 부른 이름이다. 나중에는 갈산에 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옛날부터 있던 학교라는 뜻으로 구학교라고 불렀다. 호명학교 건물은 1980년경에 완전히 없어졌다. 호명학교 터는 지금 갈산중학교 교정 서쪽 담을 경계로 하여 위치해 있었다. 이상이 이건엽 옹이 전해주는 호명학교에 대한 기억이다.
현재 호명학교에 관한 자료들은 거의 사라지고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김좌진과 관련된 기록들과 지역 어른들의 고증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호명학교 뿌리 찾기와 관련하여 좀 더 정확한 자료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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