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
강선화
희미한 저 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큰 덩어리가 누더기에 둘러 싸여 있다
태워버리려고, 하나, 둘 벗겨 본다
아득한 곳에서 기억들이 꼬물꼬물 기어 나온다
형체도 없이 생각만 눈앞에서 흔들거린다
예행연습 없이 걸어오면서
각본 없는 연극을 혼자서 해왔다
버리고 잃어도 나이만 빼고
모두 반납하련다
<감상> 누더기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흐미한 저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큰 덩어리’가 있다면, 현실의 삶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원의 흔적(痕迹)]일 수 있다. 그 덩어리야 말로 지나가버린 삶의 [원의 흔적(痕迹)] 앞에서 마음껏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삶의 [추억(追憶)]이요, 그 추억이 새로운 삶으로 인생을 두 번 살게 해줄 만큼 넉넉한 행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때때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을‘태워버리려고 하나, 둘 벗겨보’지만, 그것은‘아득한 곳에서’‘꼬물꼬물 기어나’올 뿐이다. 아무런‘형체도 없이 생각만 눈앞에 흔들거’리기만 한다. 그 [추억(追憶)]속에 남아 있는 삶의 [원의 흔적(痕迹)]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각본 없는 연극을 혼자서 해왔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새삼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은 나이를 먼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는 릴케의 말을 떠오른다. 구재기<시인·갈산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