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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벌판에서 화해의 춤을 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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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벌판에서 화해의 춤을 춥시다
  • 양훈철 기자
  • 승인 2005.1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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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조사 진실과 화해위원회 발족
준비위, 지난달부터 보도연맹사건 조사
과거사법 따라 국가진상조사위 12월 태동
' 묻혀진 진실’ 밝혀내 주민화해 모색
‘보도연맹원 등 83명 용봉산서 집단학살’ 증언
죄명도 모르고 죽임당했던 ‘기막힌 역사’
‘마음의 분단선’ 허물고 진정한 화합 이뤄야



한국전쟁을 전후해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한반도의 구석구석에는 뿌리 깊은 상처가 남아 있다. 홍성지역에도 좌·우익의 학살과 보복학살이 빚어냈던 슬픈 역사가 있다. 그 시대의 주인공들은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되었거나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지만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고통의 내재화를 심화시켜갈 뿐이다. 본지는 15년 전인 1990년 홍성의 해방전후사에 대한 기획기사를 게재해 역사적 진실 규명을 통한 주민 화해의 계기를 만드는 노력을 시도한 바 있으나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쟁의 혼란기에 희생된 원혼을 달랠 위령비조차 세우지 못했다. 평화통일로 가기위한 진정한 행보는 남과 북의 철조망를 걷어내기에 앞서 남-남갈등을 해소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본지는 보도연맹사건 등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시 한번 조명한다. <편집자 주>

지난달 22일 저녁 7시 홍성YMCA 회의실에서는 조촐한 모임결성식이 열렸다. 홍성지역 진보적 인사 14명이 모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지역화합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홍성 진실과 화해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창립식을 가진 것이다.

이날 창립식에서는 발족선언문 낭독을 통해 향후 진실규명 작업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인 이춘열 씨가 특별 초빙돼 ‘과거사 정리 어떻게 할 것인갗를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춘열 씨는 강연에서 “한국전쟁기에 학살당한 민간인은 1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군과 국군 및 인민군에 의한 학살 뿐만 아니라 경찰 및 좌·우익단체에 의한 학살도 부지기수다. 전시특별명령에 의한 단심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마을단위나 가족단위로 무차별 살해됐다.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이며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다행히 과거사법이 제정돼 12월초에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내년부터 진상조사작업이 개시된다. 향후 4년간 진상조사 및 위령·화해사업이 진행될 예정이지만 묻혀진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거론조차 금기시 돼왔던 문제이므로 손자가 할아버지의 삶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힘을 합쳐 후대에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를 성찰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정부의 과거사정리위의 구성에 발맞추어 과거사 진상조사작업 및 피해자 신고접수에 필요한 기초자료조사에 나설 예정이며 위령비 건립 및 희생자 합동위령제 등의 화해사업에도 중심축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10월 하순에 꾸려진 진실화해위 준비위는 이미 지난달부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중심으로 조사를 벌여왔다.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해방직후 혼란기에 좌익단체에 가담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직된 일종의 관변반공단체였다. 대한민국 절대지지와 북한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 배격분쇄, 남·북로당 폭로분쇄 등을 강령으로 이승만 정권의 내무, 법무, 국방부장관 밑에 사무국장을 두고 서울시연맹과 각 시·도연맹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전국적인 정부조직으로 한국전쟁 직전에는 35만5천여명이 소속됐었다.

홍성지역에서도 해방후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등에 소속됐던 사람들 100여명이 가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3일 후 예비검속으로 소환돼 보도연맹사무실(홍성경찰서 상무관)에 갇혔다가 용봉산 골짜기로 끌려가 집단으로 총살당한 것이다.

당시 학살을 자행했던 가해자가 김창룡이 이끌던 특무대였는지 경찰이었는지는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전력이 없던 사람들도 전란의 와중에 함께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가 많아 향후 철저한 진상조사가 요구되고 있다.

용봉산 골짜기 학살현장

지난 10월 29일 홍성진실화해위를 준비했던 10여명의 사람들이 꾀꼬리단풍이 곱게 물든 용봉산 입구에 모였다.

이들의 만남은 보도연맹원의 집단학살 장소라고 알려진 용봉산 ‘폐광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이곳에서 홍북면 신경리에 거주하는 이모(당시 18세로 학살 이틀후 현장을 확인) 씨를 만나 사건현장을 찾아나섰다. 이 씨는 기억을 더듬어 용봉산 매표소까지 올라간 후 좌측의 숲으로 들어갔다. 이 씨의 증언에 의하면 대나무숲 뒤편의 골짜기가 사건현장이었다. 일행은 바짓가랑이에 붙는 도깨비풀을 떼어내며 길이 없는 산속으로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이 씨는 학살당시에는 폐가가 있던 곳에 금광에서 캔 원석을 깨는 집(그는 이곳을 방앗간이라고 표현했다)이 있었다고 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학살현장이 폐광터라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광산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이 씨는 당시 사금광산이 여러 곳 있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당시와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며 작은 골짜기 두 곳을 지나 한 골짜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보더니 이곳이 맞다며 작은 골짜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곳은 매표소 바로 뒤편에 있는 작은 계곡이었다. 이 노인은 나무 옆에 앉아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유월이니까 제법 더웠어. 더구나 한낮이었지.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포승줄로 묶여서 신작로에서 농장옆 작은 길을 통해 끌려 올라왔지. 그땐 이렇게 나무들이 없었어. 잔디가 잘 깔려있었지. 사람들이 끌려 올라와서 이곳에서 총에 맞아 죽었지. 난 죽이는 건 못봤어. 죽인 놈들 빼고는 아무도 못봤지. 무서워서 어디 집밖에 나올 수나 있었겠어? 난 이틀 뒤에나 올라와 봤어. 사람들이 서로 포개지거나 여기저기 널브러져 죽어있었지. 이곳으로 밀어 넣고 무차별사격을 했던 거지. 날이 더워서... (시신들이) 금방 썩잖아... 냄새가 지독했지. 나중에 들으니까 기택이 아버지도 홍북지서에서 여기로 끌려왔는데 자기 집이 바로 코앞에 있었던 거야. 그래서 다급하게 ‘기택아, 기택아’ 하고 아들이름을 불렀대. 그런데 식구들은 당시 기택이 아버지가 조선정판사사건으로 수원형무소에 갇혀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서 아버지목소리를 듣고도 나가보지도 않은 거야. 참 기가 막힌 일이지.(당시 기택이 아버지는 수원형무소에 갇혀있다가 풀려나 기차를 타고 홍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머리를 박박 깍은 모습으로 돌아오다가 홍성역에서 경찰에 체포돼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끌려가 살해됐다)”

“좀도둑까지 끌고가 죽였지”

일행은 자리를 옮겨 용봉산 진입로 초입의 작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 씨는 소주를 들이키며 자신이 보았던 현장과 당시에 돌았던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신들은 가족들이 와서 소달구지로 실어갔어. 대부분 그랬지.(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83명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가족들이 수습하지 못했던 시신들은 남산공원 구 세무서 뒤로 옮겨졌다.) 그때 그 끔찍한 학살현장에서 한명이 살아나왔지. 월산 살던 장 씨 였는데 총에 맞고 엎어져 있다가 기어내려왔다더구만. 피를 흘리면서 계곡으로 기어내려와(용봉산 진입로 우측의 큰 계곡) 물을 마시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산을 내려갔었대. 총에 맞아 피를 흘렸으니 얼마나 목이 말랐을 거여. 그렇게 천우신조로 살아났건만 결국 그이도 얼마 못살았어. 인민군이 다시 북으로 후퇴하고 국군이 다시 들어오면서 죽임을 당했지.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혀를 끌끌찼다.)”

노인은 퇴줏잔을 비우듯 잔을 털어 넣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유치장에 있었던 이들 다 데리고 올라왔다더구만. 말로는 보도연맹원이라지만 좀도둑까지 데리고 올라와서 죽인거지. 기택이 아버지도 그렇게 죽었구. (보도연맹원들은 유치장이 아니라 따로 상무관이라는 곳에 수용했었다. 대부분의 보도연맹원은 볼일이 있으니 잠시 보도연맹사무실로 나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나왔다가 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00 씨 증언) 이 동네가 참 묘한 동네야. 그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고 인민군이 들어와서 또 죽이구, 나중에 국군이 다시 들어오면서 또 보복학살이 있었지. 물꼬싸움으로 감정이 악화된 마을사람이 상대를 고발해 죽이기도 했다더구만. 또 어떤 이는 인민군 군가 불렀다고 죽어나갔구.” 노인은 담배를 달라고 해서 불을 붙여 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당시 홍성의 좌익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이강세 씨의 아들인 이종민 씨가 자기 아버지도 당시에 끌려가 실종됐는데 대전으로 끌려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며 아버지 돌아가신 곳에 흙이라도 한줌 가져다가 가묘라도 세우고 싶다고 심정을 토로하자 노인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이 씨의 손을 잡으며 “죄명도 모르고 끌려가 죽어야 했던 역사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길 바라고 나도 최대한 돕겠네”라고 말했다.

“우리는 화해를 소망한다”

홍성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발족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지역의 아픈 과거역사가 치유되지 않고는 미래를 향한 어떠한 노력도 불신을 잉태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기에 오늘의 출발은 과거에 대한 치유요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간직하는 자리다. 우리는 홍성주민의 마음의 분단선이 허물어지고 평화를 향한 화해와 협력의 꽃들이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제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 집단적 치유의 노력이 필요하다.

거제군 등 몇몇 지역은 좌·우익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역민이 함께 모여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과거의 아픔을 지역의 화합이라는 대승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화해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함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이뤄가는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홍성지역에서도 다부진 첫발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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