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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길 따라 민초들 애환 굽이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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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길 따라 민초들 애환 굽이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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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1.28 00:00
  •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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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원 찬<홍성여고 교사>

‘내포’의 자연지리적 환경


홍성에서는 해마다 ‘내포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때 ‘내포’란 사전적 의미로는 강어귀의 바닷물이 육지 안쪽으로 깊숙하게 드나드는 곳을 일컫지만 구체적인 범위는 가야산 주변의 10여개 고을을 가리킨다(‘택리지’ 8도총론). 예컨대 가야산의 동쪽에 홍성·덕산·예산·신창이 있고, 서쪽에 보령·결성·해미가 있으며, 북쪽에 태안·서산·면천·당진 등이 있다. 내포지역에는 아산의 공세곶포, 덕산의 유궁포, 홍주의 광천, 서산의 성연 등과 같은 포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유통 경제가 발달하였다.

내포와 불교문화

내포지역과 불교의 만남은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서산 운산의 용현계곡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 예산군 수덕사 등은 이러한 사실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그 후 내포지역의 불교문화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홍성의 용봉산, 보령의 성주산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고려시대 충청지방에서는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의 양식을 계승한 거대한 불·보살상들이 조각되었는데 내포지역은 그 중심에 있었다. 예컨대 홍성 용봉산에 있는 상하리 석불입상과 신경리 마애불상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내포와 홍주의병

홍주의병은 홍주목의 관할 영역에서 을미년(1895~6)과 병오년(1906)의 2차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의병 투쟁을 일컫는다. 홍주는 나라가 어려워 구국 투쟁을 전개할 때면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홍주목이 지니는 다양한 특징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홍주목은 차령산맥 북쪽의 행정 중심지였고, 보부상이 가지는 유통 경제권의 중심이었으며, 수덕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구가 형성되는 것처럼 공통의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사상적으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이어가는 호론(湖論)의 중심부였다. 홍주의병의 정신은 내포지역에 남아 한용운·김좌진·윤봉길 등으로 이어져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독립 투쟁으로 빛을 발한다.

내포와 천주교

내포지역과 천주교의 만남은 당진의 합덕, 예산의 신암·고덕 등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서해로 중국과 직접 통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경기도와도 인접하여 새로운 사상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지리적인 특성과 이존창의 활약으로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해졌다. 특히 염전의 일꾼이나 농부들과 같은 평민층이 신자의 주류를 이루면서 교세가 확장되었음은 내포의 신앙공동체가 가지는 특징이다.
내포지방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것도 진산사건 이후였다. 지역적으로 박해 상황을 알아보면, 신유년(1801) 이전 초기에는 홍주·덕산·면천·당진·청양 등지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후 보령·서천 등지의 남부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어서 해미·서산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해미·홍주·공주에서 형을 받는데, 대부분 해미로 압송되었지만 주요 인물은 홍주·공주와 같은 상급기관으로 압송되었다.

내포와 동학농민운동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1894년에 이르면 태안을 비롯한 서산·당진·예산·홍주·남포·공주 등지에 포교되었다. 삽교 출신 춘암 박인호의 노력은 홍주목 곳곳에 동학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박인호는 덕의대접주가 된 이후 홍주목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홍주목에서는 조직적인 봉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세가 꾸준히 강화되면서 10월 1일 서산과 태안에서 첫 봉기를 일으켰다. 서산과 태안 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이어서 해미를 함락하고, 아산과 결성 관아에서 무기를 보충하면서 예포대도소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결전의 준비를 했다. 11월 19일 남포 싸움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이어 한산과 서천까지 점령하면서 홍주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주읍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홍주목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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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아 2005-12-04 23:04:53
정정해주세요!!

고경민 2005-12-02 22:34:25
다른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듯이 부보상이 바른 표현입니다.

김우영 2005-12-02 20:49:15
안녕하십니까? 저는 경기대학교에 재학중인 김우영입니다.
윗글에 쓰인 보부상이라는 명칭은 잘 못 된것입니다. 올바른 명칭은 부보상입니다. 부보상은 조선 태조대왕께서 직접 하사하신 명칭입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역사적 사료는 bubosang.ne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꼭 한번 들리셔서 자세한 내용 확인하시고 올바르게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안승원 2005-12-02 19:06:56
http://www.bubosang.net

김용식 2005-12-02 18:57:34
부보상의 올바른 표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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