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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홍주의병장 민종식의 홍주성에서의 최후 행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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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홍주의병장 민종식의 홍주성에서의 최후 행적은?
  • 김복실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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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상으로 피신" … "체포 후 진술 도주" 진실게임
홍주의사총은 1906년 을사조약에 항거 홍성을 비롯 청양, 서천 등지에서 봉기한 병오의병들이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산화, 그 유골이 모셔진 묘역으로 1973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가 2001년 8월 국가사적 제 431호로 승격된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또한 병오항일의병은 구한말 최대 규모의 의병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일깨워 홍성군민들에게 충의 열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중요 사적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주의사총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상반된 견해와 주장이 계속 제기되면서 끝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이견은 천도교령과 일부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홍주의사총에 모셔진 유골은 홍주성 전투에서 순의한 의병이 아니라 동학혁명군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는 일단 천도교령에서 행정심판 청구까지 했다가 취하하면서 현재 공론화 되고 있지 않으나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또 하나의 역사적 논란이 지난해 6월 공론화 되면서 홍성지역에 파문을 던졌다. 홍주의사총 묘 옆에 세워진 '丙午殉亂將士公墓碑(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와 관련된 것으로 비문의 저자에 대한 의문 제기와 일부 내용이 왜곡돼 있다는 주장이 한 역사학자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 지역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이같은 주장이 오히려 병오홍주의병사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며 국가사적지인 홍주의사총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홍주의사총 비문을 둘러싼 논쟁을 심층 진단해 봄으로써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진정한 호국 보훈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역사학자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씨는 2002년 6월 20일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홍성의 홍주문화회관에서 주최한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홍주의사총 비문중 의병장 민종식(1861~1917) 선생이 '도망갔다'는 기술은 역사왜곡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가 문제 삼은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의 비문은 '처음에 왕명을 받들고 군자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적(왜놈)들이 공격해 옴을 미리 알고 성을 넘어가 죽음을 면한 자 있으니, 가로되 민종식은 글로 남기어 후세에 전하지 않을 도리가 없도다.(홍주의사총내 번역비문 인용)'라는 내용이다.

박 교수는 이날 강연자료로 발표한 '의병장 민종식의 항일투쟁'이란 글에서 '민종식 대장은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몸이었고 실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옆에 안덕인이란 이름의 힘센 호위병이 있어 그의 등에 업혀서 성을 탈출했던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민종식 대장의 홍주성 전투에서의 최후에 대한 박 교수의 기술 부분을 요약해 좀 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의 공격은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조양문에 폭탄을 터트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시가전은 새벽 7시 30분 까지 다섯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민가에 불을 질러 홍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홍주성 전투로 민간이 1000여명이 학살당했고 145명의 의병이 체포되었다. 왜 의병들이 일본군에 졌을까. 의병들이 갖고 있던 무기는 화승총이었다. 소총 한 자루, 권총 한 자루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주의병들은 거의 모두가 성을 빠져나가 피신해야만 했다. 민종식 대장은 설상가상으로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다행히 민종식을 호위하던 포수 안덕인이 대장을 등에 업고 성을 빠져나와 공주 이종원의 댁에 피신하였다.'

박 교수는 진상이 이러했는데도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지방에서 들려오는 소문과 일본관헌의 발표에만 의존해 6월 6일자 '홍주참경'이란 기사에서 '창의대장 민종식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때마침 힘센 장정을 만나 그 사람의 등에 업혀 도주하였더라'라고 민종식 대장에 대해 중대한 오보를 했고,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권 5)에 "이때 민종식은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여~'라고 사실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대한매일신보>와 <매천야록>의 기록이 잘못되는 바람에 의병대장 민종식이 부하들을 버려두고 비열하게 자기만 도주한 것으로 전해져 왔으며, 홍주의사총 비문에 민종식 대장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죽음을 면하려 한 자(跳免者)'라 기록한 것도 잘못된 전설이 그대로 기술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문 맞다" 가 주류

그러나 민종식 의병장의 홍주성 전투에서의 최후 행적에 대해 박 교수와는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내용은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최초 '홍성군지'라 할 수 있는 <洪陽史(홍양사)>(1969년 발간)에는 민종식이 적이 공격해 올 것을 짐작하고 성을 넘어 피신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홍양사에는 '二. 動亂篇(2. 동란편)' 32쪽부터 37쪽에 '병오항일전'이 기술되어 있는데 민종식 행적과 관련된 내용이 35쪽 상단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총독부는 패잔병의 급보를 받고 보명 2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급파하여 일병은 월계로 진주한 후 홍주성을 동북으로 포위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고 대치하였다. 이때에 주장(主將) 민종식은 이 사태를 짐작하고 성을 넘어 피신하였다.'

홍양사 '3. 항일편 '14~18쪽에 유준근(柳濬根·보령인) 홍주성의진(洪州城義陣) 유병장(儒兵將))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主將(주장)이 여러 사람들의 충고하는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선비들과 더불어 술잔만 들고 묵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게 됨에 주장 이외 몇 사람은 어둔밤에 밧줄을 타고 남문성벽을 뛰어넘어 어디로인지 가버리고 그날밤 주장없는 홍주성은 마침내 왜병의 지뢰에 동문이 깨지고 수백명의 의병이 참혹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었다'는 내용이 있다. 유림이며 향토사학자인 이민용(홍동면 팔괘리) 선생은 “2편에서 필자가 민종식을 主將(주장)이라 칭한 것을 볼 때 여기에서의 주장도 민종식 의병장을 일컫는 것이며 따라서 홍성지역에 전해오는 민종식이 동아줄 타고 성벽넘어 도망했다 구전은 틀린 게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전 홍주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전옥진(2002년 타계) 씨는 '홍양사'의 이같은 내용과 홍주의병을 연구한 사료들을 토대로 해 '민종식의 의병활동'이란 연구자료를 내놓은 바 있다. 전 씨는 이 연구서에서 "병오홍주의병전에서 민종식 창의대장의 의병활동에 대해 서로 보는 시각이나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첫째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들은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전원이 순국했는데 민종식은 적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의병대장으로서 성을 뛰어넘어 도망하였고 재기 모임처인 예산 이남규 집에서도 이남규 부자는 체포되어 참살당하였고 동참했던 참모들도 체포수감되었으나 민종식은 도피중 체포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나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을 들어 낮게 평가하는 점이다. 둘째는 홍주성의 의병전투는 중과부적으로 항전하기 어렵다는 전세를 미리 판단하고 일시 피하여 차기 성공을 위하여 후퇴한 것이라는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고 정리했다. 전 씨는 이와같은 두 주장은 타당성이 있는 견해로 간주되나 주민들의 의견은 앞주장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있다며 '의리없는 민종식'이라는 평가에 더 무게를 두었다.

비문 바꿀 필요 없어

그러나 국내 역사학계에서 홍주의병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는 "민종식 의병장이 1906년 11월 20일 체포된 후 진술한 공초에 당시 상황을 말한 내용이 있다"며 그 내용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밝혔다. 즉 민종식이 심문을 받으며 진술한 내용은 ' 9일(31일) 미시(未時) 동문에 폭파소리를 듣고 적정을 정찰토록 할 때 이미 일본군이 진격한다는 급보를 접하였다. 탄환이 비오듯 떨어지고 어떻게 할 술책이 다하여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성벽을 넘어 창의대장의 인장과 기록 등을 모두 버리고 도주했다'는 것이다.

김상기 교수는 이 내용으로 보아 박 교수가 주장하는 "총상을 입고 업혀 성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다. 또 본인만 살기 위해 도망한 것으로도 볼 수 없다. 동문이 폭파되고 일본군이 막 쳐들어오고 죽고 하니까 대장 입장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고 참모들이 대장 죽으라 할 수 없으니까 같이 모시고 나온 것이다. 재기를 위해 피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해석하며 정인보 선생이 '도주했다'고 쓴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교수는 "정인보 선생이 어떤 얘기를 듣고 비문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비판적인 입장에서 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비문이 왜곡됐고 지금와서 바꿔야 할 필요나 이유는 전혀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김 교수는 또한 “홍주전투에서 피신했다는 사실때문에 민종식 의병장의 의병활동을 평가 절하하는 해석도 경계해야 한다. 당시 의병장을 맡는다는 것은 목숨에 연연해서는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작성자 정인보도 논란

한편 박성수 교수는 또 '이 비문을 쓴 이가 유명한 위당 정인보 선생(1892~1950. 11)이라고 하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문에는 정인보 선생이 단기 4292년(1959년) 7월에 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정인보 선생은 그 때 이미 이북으로 납치되어 행방불명 상태에 있었다"며 정인보 선생이 쓴 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같이 비문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데다가 다시 세우면서 집필연대를 1949년으로 고쳐 쓴 것은 고의적인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향토사가 이민용 옹은 "정인보 선생이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을 맡았을 때 홍성을 방문했는데 그 때 홍주성 전투에 대한 주민들의 얘기와 여러 정황을 조사해 비문을 그같이 직접 써 홍성군에 전달했다는 사실을 당시 홍성에서 동행했던 관계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또한 정인보 선생의 유족들에게도 확인한 사실이다"라며 박성수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비난했다.

충남대 김상기 교수도 "정인보 선생이 납북되기 전인 1949년에 홍성군에서 받아왔다"며 정인보 선생이 직접 쓴 것이 맞다고 밝혔다.

홍성군은 1959년 9월에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를 세우면서 비문작성날짜를 비석을 세운 연도인 1959년으로 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문제가 된다는 지적에 따라 다시 세우고 한글로 번역한 비문도 옆에 설치하면서 정인보 선생이 비문을 작성한 1949년으로 고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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