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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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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4)
  • 이연우 충청남도정책자문위원장
  • 승인 2024.03.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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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전투에서의 의병의 참상은 일본경찰의 보고서에서 ‘적이 혼비백산하여 난사하는 한밤의 포성은 우리의 함성과 서로 어우러져 그 처절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계속하여 의병을 체포했다. 127명이라고 보고한 지 며칠 안 돼 포로의 숫자는 145명으로 보고됐다. 그리고 그 중에 윤석봉, 유준근 등 78명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나 이세영은 6월에 체포돼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주의 철도에 유배됐다. 의병장 유준근을 비롯해 소모장 최상집, 좌익장 이상구, 참모 안항식, 돌격장 남규진, 참모 신보균과 이식, 서기 문석환 그리고 우익장 신현두 등 9명(홍주 9의사)은 대마도로 유배돼 이즈하라메(嚴原)에서 감금생활을 했다. 이들의 대마도 유배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자행됐다.

이토는 체포된 홍주의병 중에서 4~5명을 사형에 처하고자 했으나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해 이들을 종신형에 처하고 9명의 의병지도자를 대마도에 유배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들 9명 중에 유준근과 이식, 남규진, 신현두는 7월 17일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상구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이토가 언급한 4~5명으로 보인다. 여기에 최상집, 문석환, 신보균, 안항식 등 4명이 추가되어 모두 9명이 대마도에 유배된 것이다. 들은 8월 7일 부산으로 이동해 대마도행 선편으로 8월 8일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해 감금됐다.

홍주성 전투에서 의병 수백 명 희생

한편 일본군이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탈취된 의병 측의 무기를 보면 대포 79문, 소총 236자루, 총신 340개, 창 574자루, 환도 50자루 그리고 기간(旗竿) 80개가 있었다. 이로 보아 홍주의병의 화력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러일전쟁 등 실전 경험이 있는 일본 정규군 2개 중대 이상의 공격에 몇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패전했다.

일본군은 이후 홍성에 1년 이상 주둔하면서 부녀자를 농락하고 동물을 잡아먹는 등 야만적인 행태를 자행했다. 심지어는 갓 결혼한 신부를 잡으려고 대낮에 이집 저집을 뒤지는가 하면 돌아다니는 닭을 보면 총질을 하여 잡아가는 등 행패를 벌였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양민을 학살했으며 홍주 지역에 일본인을 이주시킬 것을 계획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홍주성 전투에서 수백 명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홍주성이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의병들의 항전은 그치지 않았다. 성을 빠져나온 의병들은 민종식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항일전쟁을 준비했다. 민종식은 탈출해서 예산에서 재기를 계획했다. 병장의 생존은 재기를 도모할 수 있게 한 구심점이 됐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지휘부는 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성을 빠져 나왔다. 그 중에 이용규 등은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했다. 이 때 참석자는 이남규 부자, 민종식,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김덕진, 김운락, 황영수, 정회규, 박창로, 이만식. 이석락, 홍순대 등 수십 인에 달했다.

민종식 중심 재개 노렸지만 물거품으로

이들은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해서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밀고를 받은 충청남도 관찰사는 지방병과 순사 40여 명을 파견했다. 동시에 일본 순사대도 파견됐다.

일본 순사대가 공주에서 출발한 것은 11월 15일 오후 7시였다. 마츠나가(松永) 보좌관보가 보조원 순검을 인솔하고 공주 지부를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 5시에 대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홍주분견소에서 파견된 이와다(岩田) 보좌관보 일행과 합류했다. 이들 일본경찰대와 지방병, 여기에 일진회원이 합세해서 11월 17일 새벽에 이남규 집을 급습했다.

박창로 등 일부는 탈출하였으나 이남규 부자를 비롯해 곽한일·박윤식·이용규·황영수·정재호 등이 체포됐다. 이용규 등 체포된 이들은 예산읍에 있는 일본군 주차소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으며 민종식의 행방을 추궁 받았다. 이용규는 머리뼈가 부서지고 갈빗대가 부러지고 이가 빠질 정도로 악형을 당했다. 이남규와 아들 이충구도 매질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들은 민종식을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를 시켰다. 고문 끝에 이 사실을 알아낸 일본 순사대는 신창의 성우영 집에 갔으나 민종식은 다시 공주 탑산 쪽으로 피신한 후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를 알게 되었다.

민종식은 11월 20일 새벽 2시 공주 탑산에서 체포돼 공주부에 잡혀 갔다. 이들은 공주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민종식은 ‘통적을 살해하고 일본인을 퇴출하고 신조약서를 환부시키고자’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 민종식과 황영수·이용규·김덕진·박윤식·곽한일 등 6명은 1906년 12월 3일 일본 순사대가 호송해 경부선 철도로 서울로 이송됐다. 이남규와 성우영은 일단 귀가 조치되었으며, 정만원·이진규·신창교 3인은 무죄 방면됐다.

민종식은 경무청 감옥서에서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 받았다. 1907년 1월 25일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7월 2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졌으며 함께 재판을 받은 곽한일을 비롯하여 이용규·박윤식·김덕진·정재호·황영수 등도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전라도 신안군의 지도로 귀향을 갔다.

서울로 압송 도중 이남규 학살

민종식 등을 유배 보내고 나서 일제는 1907넌 9월 26일 기마대 100여 명을 이남규 집에 보내 일단 귀가 조치했던 이남규를 체포했다. 이남규는 사당에 들어가 조상에게 예를 올리고 가족에게도 영결을 고했다. 그를 서울로 압송해 가던 일본군은 온양의 외암리에서 그에게 단발할 것과 귀순할 것을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그를 현장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아들은 부친을 몸으로 막다가 일본군이 휘두르는 칼을 맞고 부친과 함께 숨졌다. 이어 두 종이 맨손으로 덤벼들었다. 그 중 김웅길은 현장에서 주인을 따라 숨졌다. 또 다른 종인 가수복은 중상을 입고 다행히 목숨을 건져 이 만행을 전했다.

한편 1896년 의병을 일으키고 옥고를 치렀던 김복한도 체포됐다. 그는 을시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체포되어 1906년 1월 24일 풀려났다. 옥고의 여독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 앞까지 갔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성문을 굳게 닫아 입성하지 못했다.

1906년 10월(음)에는 민종식과 의병이 밀의했다는 구실로 공주 경무청에 구속돼 악형을 당했다. 11월(음)에 서울의 경무청으로 이감돼 고초를 겪고 1907년 1월 10일 풀려났다. 이남규가 피살된 직후인 1907년 11월 18일 보령군의 순사보조원 2인과 순검 1인에 의해 또 다시 체포돼 보령군의 관노청(官奴廳)에 구금됐다. 죄명은 민심선동죄였다.

11월 20일 일본인 보조원 2인과 보령군 순검 정원조, 최종원, 문종현에 의해 보령을 떠나 공주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이송 도중 조현(槽峴)고개에서 보조원 2명이 그를 교자에서 끌어내리고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면서 난타하고 그를 향해 발포했다. 다행히 순검 정원조가 총대를 밀쳐서 탄환이 빗나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11월 27일 풀려난 후 1910년 국망을 당하자 죄인으로 자처하며 은거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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