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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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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3)
  • 이연우 충청남도정책자문위원장
  • 승인 2024.03.1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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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지치(支峙)에서의 재기

합천전투에서 패한 의병들은 이를 분하게 여기고 홍주성 점령을 위해 준비했다. 이 같은 정황은 충남관찰사 서리였던 곽찬(郭璨)이 내부에 보고한 내용에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의병 수천 명이 보령·청라 등지에서 둔취하며, 총기·탄약 탈취에 반발하여 홍주군 진격을 모의하고 있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4월 중순 공주에서 파견된 순검이 강경포에서 의병 郭建淳과 沈相寬을 체포하기도 했다.

5월 초 의병들은 남포군 일대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공주진위대 대장 이병은(李秉殷)의 5월 4일자 군부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남포군에 의병 400여 명이 둔취하던 정황이 있었다.

한편, 민종식은 합천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던 친척 민진석의 집에서 은신하던 중 조상수·이용규·이세영·이상구·이봉학 등과 재기를 협의했다. 곧이어 처남인 이용규가 초모한 의병을 근간으로 하여 5월 9일(음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치동(현 부여군 내산면 지디리)에서 의병을 재봉기했다. 이용규는 합천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진안·용담·장수·무주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집하였고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치로 와 민종식을 재차 대장에 추대한 것이었다.

민종식은 지치에서 다시 대장이 되어 부대 정비에 돌입했으며 이윽고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했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으로 가서 묵은 뒤 5월 13일 서천읍에 도착했다. 관아에 돌입한 의병부대는 서천군수 이종석을 감금시키고 양총 20여 정을 획득하였으며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에 가는 도중에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 같은 정황은 군산 일본영사관의 부사이관 스즈키(鈴木)의 보고에서도 드러난다. 서천의 의병 150명이 총기를 갖고 군아를 습격하여 금품을 약탈 후 비인에서 서천 방면 남포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의병대는 남포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여 요새인 남포성에 의지하여 반격했다. 5일 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나 의병부대는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유회군 33명도 영입하였다.

광천에서는 유학자 서승태(徐承台)의 도움으로 지역 부호인 박익병이 의병에게 군량미를 제공했다. 홍주의병은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로 들어갔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으며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의병은 남문에서 일본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오후에 서문으로 부대를 진격시키자 일본 헌병들이 동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드디어 의병들은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했다. 이 때 신문천과 천학순이 하수구를 통해 성에 들어가 4대문을 열어 의병의 입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의병은 500여 명에 달했다 한다.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한 후 총기와 탄약 그리고 우편국에 있는 금품을 확보하였다. 홍주성을 함락시키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 각지 인사들이 차례로 집결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집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무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이 때 해미군수가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금을 보냈다.

민종식은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에게 주어 고종에게 올리고자 하였다. 상주문에는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주륙할 것을 비롯하여 거병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지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홍주의병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의병이 의로움을 지켰다면서 의병의 명분을 인정한 것이다. 아울러 의병을 ‘늑멸’해서는 안되고 효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관군의 적극적인 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응은 철저한 군사적 진압작전이었다.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는 홍주의병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홍주성 전투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5월 20일부터 공주 경무고문 지부의 이와다(岩田) 경부가 이끄는 고문부 경찰대가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였는데 이 같은 정황은 당시 丸山 경무고문이 吉谷 비서관에게 보고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일본 경찰대가 3정(약 327m) 떨어진 언덕에서 홍주성을 공격하였지만 의병의 저항이 거셌고 당시 홍성군수인 이교석(李敎奭)도 의병을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홍주의병의 선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5월 21일에는 수원헌병분대 조장(曹長) 이하 12명이 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대는 대흥지역으로 패퇴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순사 사다케(佐竹)가 부상을 당하여 서울로 호송되었다.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키리하라(桐原) 경시와 조선인 경무관 장모(張某) 및 경부 1명, 일본인 순사 7명, 총순 1명, 순검 10명 등 총 21명이 증파되었다. 24일에 이들이 수원헌병분대에서 파견한 분대장 이하 14명과 공주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관군과 함께 공격하였으나 의병대가 이들을 재차 물리쳤다.

홍주의병의 선전에 일제는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 등 몇 사람을 홍주로 파견하여 의병의 형세를 살폈다. 28일에는 정찰을 위하여 도가타 겐노스케(土方源之助) 경부와 송규석(宋圭奭) 총순을 비롯한 일본 경찰들을 서문쪽으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서문 밖의 월계(月溪) 동쪽에서 의병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들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은 민종식의 명령에 따라 5월 29일 밤에 즉각 처형되었다. 직후 친일정부에서는 홍주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공주에서 20명을, 청주진위대에서 위관 1명과 병정 50명을 홍주로 파견하였다.

의병 측에서는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의병의 홍주성 입성 소식을 듣고 지원군들이 도착하였다. 보령의 유학자 윤석봉이 28일 조카 윤용원과 이교현을 데리고 들어왔다. 29일에는 곽한일과 남규진의 부대 400여 명이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홍주성이 포위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달려온 것이다.

이와 같이 몇 차례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을 홍주의병이 모두 막아내며 선전하자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재경성 남부수비대 사령관 도조(凍條) 소장과 헌병대장 오야마(小山) 대좌에게 필요한 병력을 파견하여 홍주의병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남부수비대장은 보병 제60연대장에게 대대장 소좌 다나카(田中新助)를 지휘관으로 하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를 1지대로 편성하여 홍주로 보내고, 동시에 전주수비대의 보병 1개 소대도 출동시켜 협력하게 하였다. 이 부대는 5월 27일 오후 7시 30분 서대문역에서 승차하여 밤 11시에 천안역에 도착하였다.

28일에 보병은 신창에서 숙영하고, 기병은 신례원에서 숙영하였다. 29일 오후 6시 30분에 본대가 홍주성 동방의 천전리(川前里)에서 남쪽으로 약 300미터에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여 의병의 동태를 살폈다. 일본군의 홍주성 공격은 5월 30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오전 11시 40분 성의 서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 기관총을 성의 북쪽에 설치하여 성의 동문, 서문, 북문 위의 감시병을 사격하여 쫓아냈다. 다시 기관총으로 성의 서남쪽을 사격하고 제2중대를 전진시켰다. 의병은 이에 응전하였지만 일본군은 전투경험이 많았고 화력도 의병보다 우세했다. 이들은 다니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늦은 밤 대공세를 시작하였다.

밤 11시경에 본진을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시키고 31일 새벽 2시 30분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 때 후지(藤) 소위가 인솔하는 2중대 1소대는 서문 밖의 독립 가옥에 방화하고 총격을 가했다. 호시(星) 기병 소위는 오전 2시 50분 폭파병을 이끌고 동문으로 가서 폭탄을 설치하였고 3시 10분경 동문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으며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 때 의병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3시 30분에는 북문도 파괴되고 말았다. 이에 의병은 쏟아져들어오는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했지만 일본군의 화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낸 의병은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불과 1시간도 안 된 4시경에 홍주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었다. 의병의 총수는 1000여 명이었으며, 이 중에 전사자가 60명, 포로가 127명임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경상자 2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6월 4일에는 의병 포로를 145명으로 전사자 수를 82명으로 수정하여 보고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의 수에 대하여 자료마다 적게는 80여 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이라 하여 상이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의병의 중심에 있었으며, 체포된 직후 기록한 유병장 유준근의 <마도일기>에서 300여 명이 전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300여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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