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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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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2)
  • 이연우 충청남도정책자문위원장
  • 승인 2024.03.1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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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定山)에서의 거의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세영 등 홍주지역 유학자들은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안병찬은 1906년 초부터 백장의 상소를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면서 의병봉기를 추진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했다. 이 때 안병찬은 이설과 먼저 협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설은 의병의 뜻을 묻는 안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망설이지 말고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지령(志令, 김복한)은 본시 사암(思庵)의 기백을 가지고 퇴로(退老)의 몸 감추는 법을 쓰고 있으니 그가 사무를 담당하지 않을 것은 이미 짐작한 바이나 형도 역시 그렇단 말입니까? 목의 피가 이미 다 빠지고 다시 뿌릴 만한 피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이미 국가의 存亡이 매었다 한다면 그 禍가 호흡 사이에 임박해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터인데 이제 와서 불가불 그 처음을 살펴야 하겠다는 것은 무슨 생각입니까? 이미 처음을 살펴야 한다면 또 그 끝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형은 앞뒤를 개운히 하고서야 이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장차 사람이 죽어서 成服한 뒤에야 약을 쓴다고 하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설은 민종식에게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안병찬과 임승주 등이 영수로 모시고자 하니 이를 수락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맡을 것을 권하였다.

“최근 사론(士論)이 분발하여 모두 태집(台執, 민종식)을 영수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안병찬과 임승주(林承周)에게 권하여 예의를 갖추어 나아가도록 한 것이니 반드시 이들과 더불어 擧事하여 후일 후회의 여한이 없도록 함이 어떻습니까? 일찍이 을미년의 거사 때에는 태집에게 통고치 못했는데 피차 후회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일의 잘못을 되밟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병찬은 박창로와 함께 1906년 2월 28일 이세영 집에서 만나 의병 봉기를 협의했다. 이들은 이설이 추천한 바에 따라 민종식을 만나기로 하고 다음 날인 3월 1일 정산의 천장리에 거주하는 민종식을 찾아 갔다. 민종식은 을미사변후 관직을 버리고 천장리에서 은거 중이었다.

그는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상경해서 이설과 김복한이 묵고 있는 집에 찾아가 상소문을 초해줄 것을 부탁한 바 있었다. 이설이 체포돼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산으로 내려와 있었다.

안병찬 등은 3월 11일 천장리로 그를 다시 찾아갔다. 이때는 많은 인사들이 그의 집에 와 있었다. 민종식이 그의 ‘심문조서’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들은 그의 처남인 이용규(李容珪)를 비롯한 민종식의 지인들이었다.

민종식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5만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식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천장리를 근거지로 해서 무기를 수집했으며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 등을 작성했다. 그 중에 현재 통문이 전해진다. 이 통문은 안병찬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인근 사민들에게 보내어 의병 참여를 호소한 것이다.

민종식은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예산의 광시장터에서 의병을 봉기했다. 민종식은 이곳에서 의병장에 추대돼 대장단을 세우고 천제를 올렸다. 이때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과 이용규를 비롯해 이세영, 채광묵, 박창로, 박윤식, 정재호, 이만직, 최상집, 최선재, 이상구 등이 확인된다. 또한, 의병 수백 명이 집결했던 것으로 보아 격문에 호응해 많은 인사들이 의병을 모집하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의진은 이튿날 홍주로 진격해서 동문 밖 하우령에 진을 쳤다. 이때 의병의 숫자는 600~700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서는 관군이 포를 쏘아 맞섰다. 의병장이 성문 앞에 이르자 홍주군수 이교석(李敎奭)이 대장과 종사관 2명만 들어오라고 했다. 민종식이 종사관을 데리고 성안에 들어가 이교석과 담판을 했다.

이교석은 민종식의 뜻에 처음에는 호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3일 후에 성을 허락할 것이니 의병을 이끌고 물러가 있으라”고 하고 성문을 닫았다. 민종식은 군사를 성 밖 마을로 물렀다가 다음 날 의병대를 광시로 이동시켰다. 의진의 규율을 바로 잡고 훈련을 시켰으며 목표를 바꿔 공주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병대가 공주를 향해 진군하는 중에 선두 부대가 청양의 비봉면 묵방(일명 먹고개)에 이르렀을 때 척후병이 달려와 공주의 관군과 경군 200여 명이 청양읍에서 휴식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의병진을 화성면의 화성장터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인접한 합천 옆 야산에 진을 치고 유숙했다.

그런데 다음 날(3월 18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합천전투에 대해 부여 출신으로 창의대장 종사를 맡았던 홍순대가 남긴 <해암사목>에 의하면 일본군과 관군이 합천 인근에 잠복했다가 밤을 틈타 총을 쏘며 급습하여 의병이 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다.

내부 경무국에서 펴낸 <고문경찰소지>에서는 합천전투의 전황을 상세히 알려준다. 이에 따르면 청양의 묵방에 의병대가 모여 있음을 알고 경무국 공주 지부 소속 사다케(佐竹) 보조원은 순교 2명과 헌병과 함께 오후 6시경 묵방으로 갔다. 이어서 의병대가 합천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그날 밤 10시경 합천 인근에 들어가 잠복했다. 이들 일본군은 다음날인 3월 17일 오전 5시경 의진을 공격했다.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가 충남의병기념관 유치를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3만여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의병대는 화승총으로 저항했지만 의병 23명을 체포했고, 의병장 민종식은 끝내 체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무국의 보고에서 23명을 체포하였다고 하였는데 ‘황성신문’ 1906년 3월 22일자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체포된 의병은 정산군 출신이 5명, 홍주군 출신이 23명으로 모두 28명에 달했다. 정산군 출신 5명 중에 우사준과 정윤보는 범법행위가 없었다 하여 곧바로 폴어줬지만 정산군 출신 3명과 홍주군 출신 23명 등 모두 26명을 일본 헌병이 압해여 갔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산군 출신 서덕현(徐德玄), 이종봉(李宗鳳), 이은명(李殷明), 우사준(禹士俊, 장 석방), 정윤보(丁允甫, 현장 석방), 홍주군 출신 민영옥(閔泳玉), 이계화(李季化), 우재명(禹在明), 박형진(朴亨鎭), 박온이(朴溫伊), 최이기(崔利基), 서선명(徐善明), 최경삼(崔景三), 임상춘(林相春), 이춘길(李春吉), 오정삼(吳正三), 박문숙(朴文淑), 윤택선(尹澤善), 서경춘(徐景春), 방환덕(方煥德), 강순업(姜順業), 이두성(李斗星), 한평심(韓平心), 박용달(朴用達), 안병찬(安丙瓚), 박재환(朴宰煥), 홍영섭(洪永燮), 정덕서(鄭德西).

‘황성신문’에 의하면, 일본헌병대는 총 3정과 창 2정, 환도 1개, 말 2필, 4인교 1좌, 부담(負擔: 말에 실어서 운반하는 농짝) 1척, 군안(軍案) 1건, 도서 1과 등을 탈취했다고 전하는데 4인교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의병장이 탔던 것으로 유추된다. 말 2필까지 그대로 두고 탈출하였으니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합천전투에서 체포된 안병찬을 비롯한 26명은 공주 감옥에 갇혔다. 그 중에 안병찬은 이남규의 주선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안병찬이 빨리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남규가 당시 직산 군수였던 곽찬에게 그의 석방을 간곡히 청했기 때문이었다. 안병찬은 이남규의 노력으로 민종식이 홍산에서 재기하기 4일 전인 5월 5일(음력 4월 12일) 석방돼 민종식 의진의 참모사로서 다시 종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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