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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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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1)
  • 이연우 충청남도정책자문위원장
  • 승인 2024.03.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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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즉, 홍성은 1896년과 1906년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의병투쟁이 두 차례 일어났던 역사의 바로 그 현장이다. 일제의 대한침탈과 식민지정책이 노골화 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홍주의병이다. 의병의 독립정신을 새로운 대한민국 미래 100년의 시대정신으로 삼는 이유도 국민이 스스로 깨우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에서 연유한다. 3·1절을 맞아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을 위해 노력해 온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 이연우 공동위원장으로부터 홍주의병을 재조명하고 충남의병기념관 건립 당위성에 대한 기고를 네 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의병의 정의와 홍주의병의 배경

의병이란 외적의 침략에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봉기한 민군을 뜻하며 사상적으로는 의리론·존화양이론·보국안민론 등에 입각하고 있고 그 기원은 임진왜란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말 의병은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을시늑약과 같은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항하여 20여 년 간에 걸쳐 전개한 한민족의 반침략 전쟁으로 의미가 있는데 특히, 홍주의병은 홍성군을 중심으로한 홍주문화권 지역의 항일의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충청남도의 애국정신을 상징한다.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일어났으며 이 중 1896년 일어난 제1차 항쟁은 세 가지 원인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홍주문화권의 형성이다. 홍주의병은 자체로 홍성의병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과 전개과정을 보면 홍주의병은 충청남도 서부지역 일대를 통칭하는 홍주문화권 의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차 홍주의병에 참여한 이들은 1895년 당시 홍주부(洪州府)에 거주하는 인물들이 참여했고 활동도 이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제2차 홍주의병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홍주의병의 봉기를 가능하게 한 정치사회적 요인으로는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 을사늑약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제1차 홍주의병과 관련된 사건을 보면 먼저,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조선 침략을 위한 기회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는 일본군을 불법적으로 서울로 이동시켜 놓고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안을 강요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반대하며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제는 1894년 6월 21일(양,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갑오변란은 일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침략사건이었다.

이에 홍주지역의 유생들은 갑오변란을 일제에 의한 침략행위로 간주하였고 이 같은 배경에서 갑오변란을 전후해 사직 후 낙향해 있던 김복한과 이설은 지역 유생과 민중 세력들을 규합하여 반개화 반침략의 항일 의병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사상적 연원이다. 홍주의병의 사상적 배경은 주자학의 의리론과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는 남당 한원진(1682~1751)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학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물성이론은 화이론에 철저한 이론으로 주자학 이외를 철저히 배격하는데 이 같은 사상이 동향의 후배들에게 전수돼 생사를 초월한 의병을 일으키도록 추동한 것이다. 실제, 홍주문화권 내 유학자들은 남당 한원진이라는 공통의 스승을 모시고 수학했다는 공통점 있었다.

제1차 거병과 활동

1895년 3월 정부에서는 관리나 백성 모두 두루마기 색깔을 흑색으로 바꿔 입도록 한 을미변복령을 발표했다. 화성에 거주하는 안창식은 이를 선왕의 문물이 무너진 것으로 보았으며 창의하여 이를 성토하고자 했다. 그는 1895년 4월 23일(음력)을 기하여 광천에서 시장상인들을 동원하여 창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 5월 22일(음력) 예산의 외사촌 동생인 박창로가 찾아와 청양의 장곡에서의 창의 계획을 알려주고 동참을 권유하는 등 최초의 거의를 추진했지만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8월 21일(음력) 국모가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세영을 비롯하여 박창로, 정제기, 송병직, 조병고, 김정하 등이 9월 24일 이세영 집에 다시 모였고 이후 논의를 진전한 결과 1896년 1월 13일 안병찬·채광묵이 중심이 된 제1차 홍주의병이 홍주성에 입성했다.

이들은 관찰사에게 홍주부의 백성을 단발시킬 수 없음을 내부에 건의할 것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했고,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수석으로 추대되어 홍주부 관할 22군에 대한 통문을 발송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월 18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이승우는 김복한과 이설을 불러들여 “문석봉이 비록 패하였지만 그래도 몇백 명을 모아보기는 하였는데 나는 어찌하여 한 사람도 모아보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고 하면서 이들을 구금하였고 설상가상으로 1월 21일에는 서울에서 신우균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왔다.

결국 체포된 김복한은 일본인이 “무슨 까닭으로 의병을 일으켰느냐?”고 묻자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라고 국수보복(國讐報復)에 창의의 뜻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김복한 등 체포된 지휘부 23명은 결박당한 채 80~90여 명의 순검에 의해 서울로 압송돼 가던 중 2월 14일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 도착했다.

그중 김복한 등 6명은 서울로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에 따라 2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에 이송됐다. 4월 5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이들을 불러 진술을 받았으며 4월 7일 오시(午時)에 김복한을 유배 10년,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에게는 징역 3년, 이설은 장(杖) 80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날 밤 자정 판사 김교현은 이들을 불러들여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제1차 홍주의병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거병의 배경

1906년 홍주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 늑결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지만 이미, 그 전부터 거의의 분위기가 움트고 있었다. 1904년 일제는 공사 하야시로 하여금 대한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했는데 이는 대한제국 조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50년 간 한국 국토 3할에 달하는 진황지의 개간과 정리, 척식 등 경영권 및 권리를 넘기라고 압박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훗날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이설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응하여 ‘척왜차지통고문(斥倭借地通告文)’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설은 통고문을 통해 ‘차지(借地)’는 곧 망국임을 주장하고 모든 국민이 대궐에 나아가 항쟁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에 김복한도 가세하였는데 그는 송병선에게 편지하여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가 갖는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며 민종식·이설 등과 의논할 때 좌장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이설은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듣고 김복한에게 편지를 띄워 상소를 올릴 것을 권하고 같이 상경했다.

김복한은 이설과 함께 상경해서 상소를 올려 을사5적의 매국 행위를 맹렬히 성토했다. 그는 상소에서 을사5적을 처벌할 것과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할 것을 주청했다. 이설과 김복한은 상소를 올린 지 2일 만인 12월 4일 경무청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설은 안병찬 등에게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에 따라 안병찬은 이용규, 이세영 등과 함께 민종식을 추대하고 1906년 홍주의병을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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