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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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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의 추억
  • 수필가 조승만
  • 승인 2024.02.09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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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 사람은 추억을 하며 살아가기에 살아있는 동안 동심을 그리워하며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7남매의 형제들은 그런대로 우애 있게 오손도손 살았던 것 같다. 딸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으로 나갔고 아들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주로 양복점이나 인쇄소, 자동차 서비스 공장으로 기술을 배우러 다니었다. 그것이 집안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 이상의 상급 학교를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정도이었으며 나 역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다 떨어진 작업복을 입고 막노동판을 다니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뼈가 부서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노동일을 하여 품값을 받으면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모두 저축하여 처음에는 토끼를 몇 마리 사다가 키워서 크면 팔고, 또 병아리를 사다가 키워서 계란도 팔고, 키운 닭도 팔아서 목돈을 마련하여 새끼 돼지를 사다가 키웠고, 그 돼지가 또다시 새끼를 낳아 키워 팔고를 계속하여 돈을 모아서 나중에는 송아지를 사다가 키웠다.

그렇게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우리 집에는 돼지 대여섯 마리와 소 대여섯 마리 정도를 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나는 가축을 기르는데 취미가 있어서 지금까지 가축을 계속하여 키웠으면 돈도 많이 벌어 소 부자 돼지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임용되고 나서 군대에 다녀온 후부터는 가축을 키우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하지 못했으며 그때가 나의 마지막 가축사육이었던 것 같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시냇가의 냇둑에는 여름철에 소들을 매어 놓아 풀을 먹이도록 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소를 외양간에서 데리고 나와 냇둑에 매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흔히 하천 제방이나 학교의 경사진 곳 또는 야산에 매어 놓는 것이 농촌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곳에 매어 놓으면 소들은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쉴 새 없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맛있게도 먹어 치웠다. 풀을 먹고 나면 소들은 땅바닥에 편안하게 앉아서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성가시게 달려드는 파리 떼를 머리와 꼬리로 후 저어 쫓으면서 쉴 새 없이 되새김질하느라고 입을 우물우물하였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냇둑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의 풍경이 평화스럽게 다가온다. 배불리 먹었으니, 소들도 남부러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시골에서 하천 둑에 소를 매어 놓고 키우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하천 둑에 매어 놓으면 도씨 아저씨든 누가 가져가도 금방 가져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일까?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것일까?

어릴 적 우리 집은 시내 주변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초가집이었고 이웃의 다른 집들도 거의 대부분 초가집이 많았다. 그 당시는 가축사육제한구역이라는 규제가 없어서 시내에서도 마음대로 소 돼지를 사육하던 시절이었다.

여름에는 소에게 주어야 할 풀을 매일 베어야 하는데 소 꼴은 나의 아버지가 거의 베었지만 아버지가 농사일에 바쁘실 때는 내가 도맡아서 하기도 했다. 여름철 장마 때 비가 오면 소 꼴을 베지 못하므로 마른 짚을 먹여야 하는데, 마른 짚이 흔하지도 않았고 사료를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던 탓에 보리방아를 찧을 때 생겨나는 보릿겨를 구정물에다가 조금씩 넣어서 먹였다. 그러면 소는 배가 고팠던지 구정물을 쭉쭉 들이마셔 댔으며 가난한 집의 비쩍 마른 소는 살이 찔 여유가 없었다.

어쩌다가 명절날이 다가와서 어머니가 집에서 두부를 하게 되면 그날은 소들의 잔칫날이다. 두부를 하느라고 콩을 물에 불려 맷돌의 홈 파인 곳에 물을 넣으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루 종일 맷돌의 손잡이를 잡고 갈아서 커다란 가마솥에 끓여 낸 후 간수를 두르고 순두부를 만들어 한 바가지씩 펴서 먹기도 하고 베보자기에 넣어 기다란 통나무를 대고 우리 형제들이 눌러서 물을 짜내고 두부 틀에 넣어 두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어머니는 베보자기 안에 남아있는 비지를 뜨거운 아랫목에 하루 정도 띄워서 돼지고기를 넣어 비지찌개를 해 먹기도 했는데 별미 중에서 별미였다. 그리고 소들에 게 비지를 몇 주먹씩 여물에 던져 섞어주면 잘도 먹었으며 미지근한 두붓물을 주면 밀물 빨려 들어가듯이 그렇게도 잘 먹었다.

내 나이가 초등학교 4학년 정도가 되었을 무렵인 것 같다. 한 번은 소를 데리고 우리 집에서 얼마 안 되는 학교의 경사진 독에서 풀을 뜯기다가 그곳에 아예 소를 때어 놓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떤 아이가 황급히 내게 달려와서 말했다.

“학교 소사(나중에는 청부라고 바뀜) 아저씨가 쇠말뚝을 뽑아서 너희네 소를 끌고 가 학교 내 창고 앞마당에 매어 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얼른 학교로 달려갔다. 나이가 많이 드신 소사 아저씨한테 “이 소가 우리 소인데 왜 이리 데려왔어요? 얼른 주세요.” 하며 소고삐를 잡아당기며 끌고 나오려는 순간 소사 아저씨는 들은 척도 안 하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이 소 말이다, 학교 둑에 매어 놔서 둑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서 학교 안으로 끌고 왔다. 왜 학교 둑에다가 매어 놨느냐. 앞으로 소를 또 맬래, 안 맬래?” 하며 나를 다그쳤다.

그러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를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소를 집으로 데려갈 생각만 하고 “부모님은 논에 가셔서 일하시느라고 안 계시다”라고 하며 다시는 안 매겠다고 소고삐를 잡고 떼굴떼굴 구르면서 통사정하여 간신히 소를 집으로 끌고 온 적도 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낄낄대며 웃기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생각이 들며 저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나는 목동을 꿈꾸며 살았다. 겉보리 익어가는 감자꽃 필 무렵에 푸른 초원에서 종달새 우짖는 소리에 덩달아 풀피리 만들어 불고, 여름밤이면 돗자리 깔고 누워 모깃불을 피우면서 쏟아지는 별똥별을 세고, 한낮에 소들이 평화스럽게 풀을 뜯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소들의 우직함처럼 양들의 순박함처럼 자유롭게 들판의 자연을 음미하며 그 속에서 욕심 없이 사는 그런 목동의 순수한 꿈이 내 안에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양치기 소년처럼 나는 감수성 있는 영원한 소년을 꿈꾸는 그런 모습을 늘 동경하였다.

그러한 것이 나를 감성적으로 성장하게 했고 자유인처럼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가축을 돌보는 순수한 목동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목동의 꿈이 실현된 것일까? 아무런 간섭과 규율을 받지 않고 평화스러운 자유인처럼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역의 주민을 보살피고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 어찌 보면 작은 고을의 목민관이라고나 할까? 나는 언제나 포근하게 나를 안아 줄 것 같은 푸른 초원에서 행복하게 뛰노는 목동을 꿈꾼다. 아! 목동!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지금의 나를 버리고 얼른이라도 달려가서 동심의 호수 그곳에 풍덩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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