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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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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 조종수 수필가
  • 승인 2023.11.20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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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 다섯 개 시·군에 걸친 지리산의 둘레를 원형으로 연결하고 21개로 나누어 놓은 순례길 중, 위태마을~하동호 구간을 걸었다. 위태마을~지네재~오율마을~궁항마을~양이터재~나본마을~하동호로 이어진 11.5km의 걷는 길이다.

위태마을회관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면 장승 형상의 이정표가 나오는데 빨간색 화살표가 지네재 방향이다. 흩어져 있는 집들, 감나무와 밤나무, 이름 모를 야생초가 어우러진 한가로운 산촌을 지나면 비탈진 숲길이 나오고 고갯마루에 주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이 ‘지네재’인데, 능선이 지네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한 고개를 넘었을 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무거워진 몸을 추스르고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리막길이다. 힘들게 올라온 수고를 쉽게 반납하자니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터덜터덜 내려가 오율마을에 도착했으나 반갑지 않다. 다시 오르막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밑바닥은 아니었지만, 내려왔던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지친 몸을 더욱 힘들게 한다.

숨이 턱까지 올라오는 어려움을 감내하며 두 번째 고개를 넘자, 평탄 길이 이어진다. 힘든 일을 극복하면 한숨을 돌리게 되는 것이 삶의 이치와 같은 것일까? 슬쩍 하늘을 보니 어느새 궁항마을이다. 궁항마을 길을 지나면 양이터재 방향으로 조금씩 경사가 높아져 간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한 고비를 넘겨 순탄한 길을 걸어왔는데 다시금 고비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힘든 난관을 몇 차례 지나서인지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양이터재…. 임진왜란 때 양씨와 이씨가 피난 와서 터를 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번 둘레길 중 가장 높은 곳이자 마지막 고갯길이다. 처음에는 낙오되지 않고 갈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거의 다 와 간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길이 아쉽기만 하다. 왜 그동안 걸어온 길가의 풍경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 갈 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둘레길을 왜 걸었는지 이유가 궁색해진다.

둘레길 중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 완만한 임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데 그만 갈 때가 되었는지 장승의 화상표가 길가의 좁고 비탈이 심한 샛길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라도 풍경을 감상하나 했더니 멈춤의 시간이 온 것이다.

비탈길 따라 작은 계곡 징검다리를 건너자 오래된 대숲 오솔길에 60년 만에 한 번 꽃피우고 생을 마감한다는 대나무꽃이 시든 풀잎처럼 피어있다. 평생을 곧게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마지막 모습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다시 밑바닥까지 내려와 마을의 반이 수몰되었다는 나본마을에서 데크로 된 호숫길을 걸었다. 멀리 제방이 있고, 그 끝이 하동호 종착지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니 비탈길을 오르는 어려움을 견디면 꿀 같은 평지 길이 이어지고 한숨 돌리면 돌연 내리막길이 있었다. 힘들게 올라온 수고를 반납하고 나면 또다시 이어지는 오르막길, 어쩌면 인생의 여정과 다름이 아니다.

제일 높은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도 급해지기 마련, 그래도 내려가는 길에, 곧게 살다 가노라고, 비록 초라하지만, 대나무는 자축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둘레길 어느 구간쯤에서 만나 줄곧 함께 걷던 동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방향을 돌렸다. 그의 목표가 산정이었는지, 둘레길이었는지 불분명하지만, 한 명의 벗이 길을 달리한다는 것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산정으로 가는 길은 둘레길과는 같은 듯 다른 길이다. 그리고 둘레길의 구간이 반드시 위태에서 하동호까지일 필요도 없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천왕봉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지리산 둘레 295.1km 중 가장 맘에 드는 길을 자신만의 구간으로 만들어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목표가 무엇이었든지 그것에만 의미를 두지 말고, 길에서 만났던 풍경과 사람, 이야기들도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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