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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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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 청운대 김미경 교수
  • 승인 2023.10.23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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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 서두다.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의 작가 김은숙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이 한 대사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당연히) ‘낭만’일 것이다. 김사부는 틈만 나면 상대가 감동할 명언을 날리고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그것을 전문용어로 개멋 부린다고 그러지. 조금 더 고급진 용어로는 낭만이라고 하고.” 요즘 Z세대는 ‘낭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SNS게시물, 유튜브 댓글에도 ‘낭만’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본래 낭만(浪漫)은 라틴어 ‘로망(Roman)’의 한자 표기다. 일본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1907년 ‘문학론’에서 낭만주의라는 장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다. ‘낭만’의 본래 의미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꿈과 감정에 충실한 태도’로 한국에서 빨라야 1910년대 확립되었다. 앞서 언급한 모든 대중문화에서 나타난 ‘낭만’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떠올리면, 자신의 무상함과 도덕성의 진리를 함축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동경(憧憬)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낭만이란 현실에 없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일 것이다.

삶의 전장에서 버티며 살아온 현실에서 잊고 있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상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나는 80년대 꼰대의 시대를 지나 지금에 와 있다.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몸소 체득한 시대를 살았다. 나이, 남성, 직급, 재력, 학력, 권력, 학력 등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약자를 노골적으로 억압한 시대를 넘어왔다.

그래서 저항과 비판과 실천을 통해 약자에 공감하고자 했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 가는 세상을 이루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과 기대는 깨어지고 실망, 낭패, 좌절감만 남았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는 배신감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기대의 깨어짐은 진실의 발견에 가깝다.

진실의 발견 앞에 불어 닥친 사막의 건조한 바람으로부터 나를 따뜻하게 해 줄 또 다른 이상적 동경을 위해 더 이상 ‘관계’를 윗자리에 두지 않기로 했다. 어느 날 홍성의 낭만 닥터들이 오골계 백숙 잔치를 위해 도라지 즙과 산삼 즙 등 일상의 낭만 흔적들을 들고 ‘항신식당’에 모였다. 젓갈냄새 가득한 파김치와 오골계의 검은 속살의 향기가 왠지 모르게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나의 참새방앗간 ‘장터치킨’의 옛날과자와 노가리가 기다리고 있는 한, 큰 가치와 관계의 긴장에서 벗어나 이해, 관용, 배려의 일상을 헤엄치며 무심하게 그 순간의 이상적인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 낭만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때 느끼는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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