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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로장생’과 ‘불효자는 옵니다’ - 한글날 즈음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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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로장생’과 ‘불효자는 옵니다’ - 한글날 즈음의 단상
  • 대정초 이준희 교장
  • 승인 2023.09.27 2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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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사무실 버려진 귤 상자의 겉면에 ‘귤로장생’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제주도 산지인 귤을 담은 상자에 ‘귤로장생’이라 이름 붙인 판매자의 재치에 슬며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진시황이 ‘불로장생’하기 위해 전국에 귀한 약재란 약재는 모두 구하러 다녔다는데 ‘귤로장생’은 그 이름만으로도 귤만 먹으면 장수할 것만 같아 저절로 손이 더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020년 초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시작된 코로나의 유행이 그칠 줄 모르고 전국을 휩쓸고 갈 즈음부터 시작해서 그 해 우리는 감염병의 위험이 얼마나 우리 일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코로나의 유행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고 정부의 재난 문자가 빗발쳤다.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손씻기 등의 개인 수칙을 강조하면서 외출 자제, 타 지역으로의 이동 금지 조치 등이 민족의 대이동이 있을 즈음마다 안전 문자로 쏟아져 들어왔다.

5월 가정의 달에도 자제를 요구했고 여름철 휴가 기간에도 강조했고 추석 연휴 때 자칫 대유행이 될 수 있으니 이동을 멈추라 했다. 겨울은 겨울대로 그러더니 해를 넘겨 연말 연시 연휴 때도 집콕하며 가만히 있으라 했다. ‘일상’이 ‘멈춤’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명절 연휴 무렵 우리 동네 중심가 한 가운데 떠억 하니 현수막이 하나 걸렸다.

‘불효자는 옵니다’. 오래 전 유행가 제목인 ‘불효자는 웁니다’에서 모음 하나 살짝 비틀어 패러디 한 것인데 이 문구를 보고도 역시 나는 이 문구를 처음 생각한 이의 재치와 유머에 무릎을 딱 쳤다. 어떤 효자가 저 문구를 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방문을 강행하겠는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어 버리는 장난 같은 세상사를 유행 가사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말은 이렇듯 자음자 하나, 모음자 하나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진다. 세상 어느 글자가 이런 멋드러진 변화를 할 수 있을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맛깔스러움은 세상 어느 글자와도 비교 불가다. ‘윤슬’이란 예쁜 단어는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한다. ‘해미’란 말은 ‘바다 위에 낀 아주 짙은 안개’를, ‘희나리’란 말은 ‘덜 마른 장작’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말은 그 말 자체로도 신비롭고 마음에 잔잔한 무늬를 아로새긴다. 2023년 577돌의 한글날을 맞으며 우리말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세종대왕을 기리며 우리글을 바로 쓰려는 마음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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