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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늦어서 그렇지 오기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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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늦어서 그렇지 오기는 온다”
  • 윤종혁
  • 승인 2023.08.21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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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늦게 오는 사람> 발간한 이잠 시인

이잠(55) 시인이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늦게 오는 사람>을 발간했다. 시인으로 등단 후 17년 만에 첫 시집을 발간했으니, 남들에 비해 늦은 편이지만 이잠 시인은 느릿느릿 걸어 온 시의 길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음에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시인은 장곡면 옥계리에서 태어났다. 집 앞 무한천에서 물놀이도 하고, 말조개도 잡았다. 일곱 살 무렵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그녀도 메기를 잡으려 했지만 미끄러워서 놓치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이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던 모습은 꼭 잔칫날 같아 특별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느낌은 ‘꿈 같은 일’, ‘무한천’ 이라는 시로 표현됐다.

비봉초 1학년 1학기 때 광신초로 전학을 왔다. 광천읍 담산리 하담마을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7남매가 옹기종기 살던 작은 오두막집이었지만 오서산이 따뜻하게 감싸줬다. 광천여중 졸업 무렵 시골을 떠나고 싶었다. 도시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부모님은 7남매 중 막내인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 주면서 그녀를 붙잡았다. 결국 광천고 수석 입학을 하며 광천에 계속 남게 됐다.

시인은 고등학교 때 이과였다. 당시 그녀의 숨겨진 실력을 눈여겨 본 임성혁 선생님이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한다’며 자꾸 글쓰기를 권했다. 백일장에 나가 수상했다. 고3때는 용돈을 벌 생각으로 라디오방송 시 응모전에 참여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덜컥 당선됐다. 당시 응모전에 3번 당선되면 시인이 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고3 학생의 시가 소개되자 당시 중앙일보 기자가 입시에 도움이 되라며 한참 동안 응원의 편지를 보내줬고, 강원도에 있는 고등학생이 시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당시 오빠와 언니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대학 입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그녀의 딱한 사정을 헤아린 선생님이 ‘문예 장학생 제도’를 알려줬다. 1987년 단국대 국문과에 입학하게 됐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시에 대한 갈증으로 삶의 방향성 찾아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출판사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교정·교열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활자를 읽기조차 싫어질 정도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5년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내면 목소리를 찾기 위해 인도로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찾았다. 그녀 마음속에는 ‘시’에 대한 갈증이 너무나 심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 시를 쓸 정도였다. 199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등단 후 틈나는 대로 시를 썼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닥쳐왔다. 7년 정도 시를 떠나야만 했다. 아동문학작가로 글을 쓰고, 여기저기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시를 멀리하며 할수록 마음 속 공허함은 더욱 커져갔다. 시에 대한 욕구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2009년 시를 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았다. 문학창작기금 응모를 통해 지원금을 받았다. 첫 번째 시집 <해변의 개>를 발간할 수 있었다.

첫 시집 이후 경제적 문제는 그녀의 발목을 또 잡았다. 하루종일 시를 쓰고 싶었지만 현실에 순응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시를 쓰는 시간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그녀는 즉흥적으로 시를 쓰기 보다는 생각이 다듬어질 때까지 많이 기다리는 타입이다. 시를 쓰기 위해 충분한 사색이 필요한 데 현실은 그녀에서 빠른 속도를 요구했다. 시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렇지만 시인은 시의 길을 놓지 않았다. 긴 호흡 속에 한 편, 한 편을 완성해 시집에 돛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돛을 달아 펄럭이게 한 다음, 시집을 있는 힘껏 밀어 세상을 향해 떠나보냈다. <늦게 오는 사람>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시인에게 시란 내면의 나와 끝없이 이어가는 대화이다. 시인을 시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여긴다. 시를 쓰는 작업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털 난 짐승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상생해 가는 길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를 통해 본인의 사랑과 삶이 무르익어 아름답게 완성되길 바란다.

시인은 주로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돌맹이처럼 가만히 놓여 있고, 눈에 들어온 풍경이나 피사체들이 움직일 때 많은 생각이 활발히 일어난다고 한다. 익숙한 공간보다 낯선 공간을 더 선호한다. 밤 11시에 아르바이트를 끝낸 후 아무도 없는 병원 로비에서 글을 쓰기도 했다. 달리는 기차 안, 공원의 나무 밑 의자가 시인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10년 시간 속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도 

책을 읽다가 문득 영감이 떠오르면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놓는다. 어떤 책은 포스트잇이 빼곡할 정도다. 낯설지만 생각의 실마리가 될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본인의 생각으로 내면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30분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깡마른 씨앗이 풋풋한 싹을 내고 한 편의 시로 영글기 위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렇지 아주 천천히 10년의 시간이 걸려 ‘그림자나무’가 완성됐다.

시인은 이제 홍성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홍성에서 터전을 잡을 생각이다. 요즘 홍성에 와서 정원을 가꾸고 싶어 한참 씨앗을 모으고 있다. 또한 나무를 돌보는 나무의사에 도전 중이다. 나무의사가 돼서 나무와 관련한 일을 하며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글쓰기 역시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시와, 동시, 동화 등 문화예술 활동을 계속 하려고 한다.

시집 <늦게 오는 사람>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걷고 싶어하는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슬픔이 지나갈 때마가 환해졌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시가 되는 때가 있었다. 이제는 다 울고 난 뒤에 말개지는 시를 쓰고 싶다. 지구 표면 1cm의 흙이 쌓이려면 200년이 걸린다는데 몰라서 그렇지 대게는 느리게 온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느려서 그렇지 오기는 온다. 가장 환한 얼굴로 나의 사랑, 나의 삶>.

시인을 앞으로 품이 큰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엉뚱함, 천진스러움을 펼쳐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자 한다. 고향 홍성에 내려와 살면 시 세계가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지리라 확신하고 있다. 어느날 문득 고향이 그리워 광천역에 내렸을 때 오서산이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고향은 언제나 그녀 편이기 때문이다.

 

늦게 오는 사람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않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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