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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역사 위대함 알리는 데 매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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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역사 위대함 알리는 데 매진할 것
  • 김영찬 기자
  • 승인 2023.07.15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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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원 한민족사중앙연구회 회장

병약했지만 비범했던 어린 시절

이광원 회장은 홍성읍 오관리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 회장의 집안은 대대로 홍성 지역에 자리 잡은 명문가로 많은 친척들이 일제에 저항한 이력이 있다. 이 회장의 증조부는 홍주성 전투에서 돌아가시고 그 동생들도 만주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라가 없으니 호적을 등록하지 않겠다고 해서 독립이 되고 나서야 호적에 오르기도 했다.

이 회장의 어린 시절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약하게 태어나 3살 때까지 걷지 못하고 기어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벌꿀을 많이 먹고 며칠을 크게 앓고 나서야 건강을 회복했다. 집안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국민학교까지만 다닐 생각이었다.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자기 주관이 뚜렷해 옳다고 생각하면 어른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말대꾸하는 버릇없는 아이로 볼 수도 있을 텐데 할아버지는 이 회장의 똘똘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 회장의 재기를 아까워한 할아버지는 ‘중학교까지만 가르치자’고 제안해 천안에 있는 숙부의 집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농고 장학생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홍성의 위상을 높이고 알리는 것이 이 회장의 목표다. 이를 위해 지역 향토 학자들과 힘을 합칠 계획이다.
홍성의 위상을 높이고 알리는 것이 이 회장의 목표다. 이를 위해 지역 향토 학자들과 힘을 합칠 계획이다.

풍운아 같은 청년기를 보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연속이었다. 도자기 판매회사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반 만에 나왔다. 젊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후 한국기계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이 회장의 능력을 눈여겨 본 대표의 눈에 들어 기계설계까지 하게 된다. 학창시절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도면을 볼 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몇 차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무사히 국정교과서에 컨베이어 벨트를 납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회사의 제조과정을 다 봤으니 미련 없이 그만뒀다. 이 회장은 실물경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염천교 중앙시장에서 약 도매를 하는 등 시장경제를 경험하면서 돈을 크게 벌기도 했다. 물론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천에서 우유보급소를 하다 실패하고 천안으로 내려와 한동안 표구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표구사를 운영하면서 아카데미 극장 1층 커피숍에서 중견작가 서화전을 크게 열기도 했는데 당시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고암 이응노와 람정 박노수의 작품을 전시하는 무모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결정이지만 이 회장은 대범하게 넘겼다.

이광원 회장은 한민족대통합협의회 상임 회장을 맡기도 했다. 사진=한민족사중앙연구회
이광원 회장은 한민족대통합협의회 상임 회장을 맡기도 했다. 사진=한민족사중앙연구회

남다른 발상 최고 판매사원으로

표구사는 이 회장을 담기에는 너무 그릇이 작았다. 이 회장은 이번에는 마케팅이 배우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가 외판회사에 다니면서 그가 한 일은 서울에 있는 외판업체들을 방문하러 다니는 것이다. 용건이 없어도 찾아가 인사하면서 안면을 익혔다. 이렇게 다니면서 이 회장의 소문이 업계에 돌면서 원일범랑이란 곳에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는다.

1975년 원일범랑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기존 고객명부를 전부 폐기한 것이다. 회사가 가진 수백여 곳의 거래처를 전부 정리했다. 회사 대표를 비롯해 임원들도 반대했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거래처 명부는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밀어 붙였다. 기존 거래처를 정리하고 이 회장이 찾은 것은 그동안 친분을 쌓은 외판업체들이다.

그들에게 처음 판매를 부탁한 것은 업체당 고작 한개. 품질은 경쟁사보다 약간 떨어졌지만 희소가치를 높이는 전략이었다. 그때부터 주문이 밀려들었다. 당시 원일범랑의 하루 생산량은 고작 60박스였다. 하지만 주문은 250박스가 들어왔다. 공장을 주야로 풀가동했다. 나중에는 공장을 증설하면서 업계 6위에서 업계 1위로 올라선다. 회사가 한순간에 뒤바뀐 것이다. 이후 원일범랑은 잉꼬범랑이라는 제품명으로 회사이름을 바꾼다. 이것도 이 회장의 제안이었다.

큰 성공을 거뒀지만 원일범랑도 곧 그만두고 나와 개인 사업을 하면서 여러 부침도 겪었다. 현재는 정수기를 만드는 잉꼬천년수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광원 한민족사중앙연구회 회장
이광원 한민족사중앙연구회 회장

한민족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

이 회장이 새로 관심을 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민족의 뿌리를 찾는 것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 회장에겐 필연으로 다가왔다. 이때부터 한민족중앙연구회를 만들고 고조선 등 고대 우리 역사를 연구하게 된다. 고대사 연구는 이제 이 회장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연구를 계속하다 홍성의 역사도 눈에 들어왔다.

홍성은 기호학파의 발생지로 특히 결성현은 조선왕조 500년 유학의 중심지라는 것이 이 회장의 주장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부터 홍성의 역사를 알리는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김좌진, 한원진, 한용운 등 지역의 위인들을 알리고 홍성의 위상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 회장은 “홍성 사람들도 홍성이 과거 조선의 정신적 중심지였다는 것을 모른다. 홍성사람들도 이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앞으로 고향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지역향토학자 등과도 연대해 홍성에 녹아있는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매진하는 것이 이 회장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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