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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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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3>
  • 오영택 명지대 특임교수
  • 승인 2022.10.2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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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24일 남편 김좌진은 만주에서 데리고 있던 동포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흉탄을 맞고 쓰러져 1930년 3월 25일 한족총연합회 주관으로 성대하게 사회장을 거행한 후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자경촌(신흥촌) 뒷산에 안장된다.

시간이 흘러 1934년 남편 김좌진의 묘소가 있는 중국 해림시 산시진에도 일본 만주국 일본인 이민단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1920년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대첩’ 후 경신참변(간도참변) 즉 일본군이 독립군과 한인 가족을 무참히 살해함은 물론 산소까지 파헤치며 잔악무도한 행위를 경험한 독립군 부하 동지들은 김좌진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김좌진 순국 후 서울로 돌아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의 묘소가 파헤쳐 훼손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남편의 유해는 반드시 고국에 묻혀야 한다는 일념으로 홀로 목숨을 건 도전길 만주로 향하여 만주 해림시 산시진에 도착한다.

삼엄한 일본의 감시를 뚫고 홀몸으로 만주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에 도착한 오숙근 여사는 장군의 옛 동지 및 부하들과 유해 송환을 위해 의논을 한다. 의논 결과 장군의 유해는 송환하기로 하고 옛 동지들의 협조로 수습하여 밀감(귤) 상자에 담아 방물장수로 위장한다.

방물장수로 위장한 오숙근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다시 귀국길 북만주 하얼빈, 길림, 단동을 거쳐 신의주로 힘들고 어렵게 귀국한다. 남편 김좌진의 유해를 모시고 힘들게 국경을 넘어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변변한 재산이나 가깝게 도와주는 집안의 연고자는 별로 없었다.

1904년 결혼 당시 김좌진의 집안은 충청도 홍주 대부호로 집안 노비만도 30여 명이 넘었는데 노비해방은 물론 이들에게 전답을 나눠주고 개인과 가정을 초월하여 오직 한 길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보니 한 집안은 파산되다시피 한 것이다. 갖은 고생 끝에 이국땅 만주에서 41세로 순국한 남편의 유해를 모시고 압록강을 넘어 온 오숙근은 계속되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힘들게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에 도착한다.

이호리 산수동마을은 김좌진 장군의 본래 고향 집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로부터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안동김씨 수북공파 선조들의 선영과 재실이 있는 곳이었고, 의병장 김복한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후학들을 가르치던 인지사가 있던 곳이다. 고국을 떠난 지 17년여 만에 목숨을 걸고 어렵게 모시고 온 남편 김좌진의 유해는 1934년 5월 21일 김복한 선생의 묘소 인근에 감시를 피해 몰래 밀장(密葬) 한다.

한편 1930년 1월 김좌진이 만주에서 순국하자 이듬해 며느리 오숙근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김좌진 장군 모친 한산이씨 이소사(1863~1949) 여사는 서울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1949년 8월 3일 86세로 작고한다. 작고한 김좌진 어머니 한산이씨는 1892년에 작고한 남편 김형규와 같이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선영에 있는 남편의 묘에 합장한다.

또한 남편 김좌진의 유해를 이호리에 밀장 후 서울에서 시어머니 한산이씨와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오숙근마저 1958년 1월 15일 70세로 사망한다. 오숙근 여사가 사망하자 아들 김두한은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에 밀장되었던 아버지 김좌진의 유해와 함께 이미 할아버지 내외분(김형규, 한산이씨)이 모셔져 있는 선영,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번지, 조부모 묘 바로 아래에 부모(김좌진· 오숙근) 묘를 조성하고 합장한다.

지역의 대부호였던 김좌진의 가문의 유일한 재산 충남 보령의 김좌진 장군 묘가 있는 선영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 많던 전답을 모두 가노들에게 나누어주고 국권회복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다 보니 김좌진 가문의 가산은 전부 탕진하게 되었고 직계 가족은 대를 잇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 장군을 모시는 제사는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전 국회의원의 시댁인 송씨(宋氏) 가문에서 김 의원의 아들 송일국과 그의 손주 세쌍둥이 대한, 민국, 만세가 모시고 있다.

그러나 애잔하게도 당시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 산소를 마련하다 보니 이 선영만이 유일한 재산으로 남아 김좌진의 부모(김형규. 한산이씨)님과 김좌진. 오숙근 부부의 묘를 현재의 묘소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번지에 마련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김좌진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 내외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됐으며, 보령시에서는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장군의 업적과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청산리대첩일인 10월 22일에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여 매년 추모 제향을 올리고 있다.

아무리 자랑스러운 민족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라도 혼자는 절대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분의 협조와 희생 속에서 이룬 업적이다. 특히 가장 가깝게 헌신한 분은 어머니 한산이씨 이소사 여사와 부인 오숙근 여사의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명문 가문에서 곱게 자란 오숙근 여사는 남편 김좌진과 결혼과 동시에 파격 행보를 걸으며 평생을 남편과 나라를 위해 그림자로 헌신한 열녀이다. 삼엄한 일제 감시를 피해 만주까지 건너가 목숨을 건 남편 김좌진 장군의 유해봉환은 위대한 국가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이 분명함에도 오숙근 여사에 대한 ‘독립운동가 지정’이나 ‘열녀 추대’가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올해 2022년 청산리대첩 기념 102주년을 맞아 오숙근 여사에 대한 그간의 공적을 평가하여 독립운동가 지정 및 열녀 추대와 동시에 열녀상(烈女像) 건립을 본격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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