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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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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헌신<2>
  • 오영택 명지대 특임교수
  • 승인 2022.10.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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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숙근은 1887년 4월 3일(음) 조선 고종 24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서 선산(善山) 도호부사(都護府使) 해주오씨 정무공파 24세 오일영(吳鎰泳)과 온양정씨(溫陽鄭氏)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1904년 김좌진 장군과 결혼하기까지 17년간 친정 안성 덕봉리(덕뫼마을)에서 생활했다.

오숙근의 친정이고 김좌진의 처가 마을인 안성 덕봉리(德峰里)에는 해주오씨가 95%나 되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는 해주오씨 11세 통례공(通禮公) 오현경(吳賢卿)이고, 파시조는 14세 정무공(定武公) 오정방(吳定邦, 1552년∼1625년)이 된다.

오숙근의 집안 정무공파 문중에서는 조선 시대 해주오씨 가문 중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데, 문과 급제 21명, 무과 급제 114명, 음서(蔭敍) 143명으로 합계 278명의 인재를 배출한 명문 가문이다. 또한 오숙근의 친정 덕봉리 덕뫼마을은 선비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1919년 안성(安城)지역의 3.1운동 본거지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마을에서 독립유공자 16명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오숙근의 친정 덕봉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5개의 해주오씨 관련 문화 유적이 있는데,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8호 ‘충신 오두인(吳斗寅)을 모신 덕봉서원(德峰書院)’, 제175호 ‘오정방(吳定邦) 고택(古宅)’, 안성시 유형문화재는 제22호 ‘오정방(吳定邦) 신도비’, 제23호 ‘오두인(吳斗寅) 선생 묘와 신도비’, 제36호 ‘오진영(吳震泳) 선생을 모시는 사당 경앙사(景仰祠)’가 있다.

오숙근의 친정 마을에는 5개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경모재(敬慕齋), 숭문각(崇文閣), 영모각(永慕閣), 백련정(白蓮亭), 백련재(白蓮齋) 등 전통가옥과 마을 내 다양한 문화역사자원이 풍부하여 2007년 문화관광부 ‘덕봉 문화역사 마을’로 지정되어 우리의 옛 문화와 유교에 대한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인성과 예절 교육을 체험하는 곳이다.

이러한 선비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부족함이 없이 곱게 자란 오숙근은 결혼하자마자 새신랑 남편 김좌진의 일제 침략에 맞서 국권회복운동, 계몽운동, 독립운동 등에 따라 파격적인 행보를 곧바로 시작한다.

당시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 즉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르고 좇아야 한다’가 일반적인 여자의 도리라 하여도 결혼과 동시에 벌어지는 급격한 변화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보람도 있었겠지만, 참한 새색시 오숙근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더 힘들고 어려웠으리라 여겨진다.

더욱이 오숙근은 1930년 1월 남편 김좌진이 만주에서 순국하자 주변을 정리하고 서울로 귀국하여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그러하듯 어렵게 생활한다.

그런데 일제가 만주 땅에 모셔진 독립군의 묘까지 파헤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부인 오숙근은 홀로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가서 김좌진의 유해를 모시고 와 조국 땅에 안장시킨 열녀가 된 것이다. 오숙근이 홀로 김좌진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봉환(奉還)하였음에 반하여, 위대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유해와 묘소는 흔적조차 못 찾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오숙근의 행적은 더 소중하고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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