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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과 청렴결백의 역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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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과 청렴결백의 역사길
  • 홍성문화원 조남민 사무국장
  • 승인 2022.08.2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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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숲길 ‘독립운동의 길을 가다’⑤ 역사인물길 5코스

걷기: 성삼문 선생 유허지~최영 장군 사당, 2.3km

성삼문 사당에서 최영 장군 사당을 걷는 역사인물길 5코스는 홍북읍 노은리 한솔기마을을 한 바퀴 돌아 원점을 회귀하는 편안한 길이다. 

이 코스는 길이가 짧고 난이도도 높지 않은 곳으로 홍북읍 노은리 한솔기마을을 한 바퀴 돌아 원점을 회귀하는 편안한 길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도로가 통과하는데, 상리(上里) 쪽은 예산과 금마로 가는 국도가 나오고 하리(下里) 쪽으로 가면 장항선 철길을 지나 내포신도시로 향할 수 있다.

이정표나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이런 마을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입구가 좁고, 막상 들어가면 길이 활처럼 휘어 너른 마을을 휘감으며, 수리봉 닭제산 매봉산에 둘러싸여 유정한 교세를 갖추고 삽교천과 만나는 이곳은 지리적으로 비범한 형상을 가진 곳이다.

바로 이 마을의 한복판에서 만고의 충신 최영 장군과 매죽헌 성삼문이 태어났다. 같은 마을 같은 집에서 100년(정확히는 102년)을 사이에 두고 두 분이 태어났다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도 전하긴 하나 확인된 바는 아직 없다.

‘성삼문 선생 유허비’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성삼문의 태생과 사육신의 절의, 유허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내포문화숲길은 마을의 한가운데에 시원하게 펼쳐진 너른 광장에서 시작된다. 이곳의 정식이름은 ‘성삼문 선생 유허지’. 유허지(遺墟址)란 ‘지금은 없거나 사라졌지만 어떤 역사적 흔적이 있었던 터’를 말하는데, 이를 기록한 증거물이나 기념물(주로 비석)이 주변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비각에 새워진 웅장한 ‘성삼문 선생 유허비’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성삼문의 태생과 사육신의 절의, 유허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외가인 이곳 홍북에서 태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며 한글창제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는 물음이 세 번 있었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는 것과, 수양대군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으리’라고 호칭하며 지조를 지킨 일화가 전한다.

그가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참하게 처형당한 역사의 아픔 또한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때 나이 38세, 성삼문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여러 곳으로 버려졌는데,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공원과 충남의 논산 등에서 성삼문의 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유허지의 바로 위쪽에는 마을이 평화롭게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노은단(魯恩壇)이 있다. 이 마을은 당초 ‘적동’이라 불리다가 후에 ‘노은(魯恩)’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노산군(魯山君, 강등된 단종을 말함)의 은혜(恩惠)’가 있을 것이라는 송시열의 글에 기인한다. 이곳은 당초 사육신을 봉향하던 서원이 있었던 곳이나, 서원이 철폐되자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고 단을 만들어 제를 지내고 있다.

노은단의 입구에는 사적기와 성삼문이 지은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 하리라)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노은단 밑으로는 몇 대째를 이어오는 오동나무가 있는데 성삼문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은 외가에서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며 축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성삼문 오동나무’가 대량 증식에 성공, 여러 곳에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나무 옆으로 큼직하고 반듯한 사당 ‘충문사’가 있는데, 2006년에 건립된 것으로 성삼문의 표준영정이 모셔져 있다.

최영 장군 사당과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불과 2.3km밖에 안 떨어져 있다. 

충문사를 지나 상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한솔기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조금 더 지나 왼편으로 오래된 고택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홍성 노은리 고택’이다. 성삼문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이곳의 예전 이름은 ‘엄찬고택’이었다. ‘ㅁ’자의 가옥이지만 보기에 따라 ‘ㅂ’자로 보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이 곳 주변으로 성삼문의 부인 묘와 부친 성승 장군의 부부묘도 둘러볼 수 있다.

최영 장군 사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마을 축사는 그래도 정겹지만 기봉사 밑의 가파른 경사는 그렇지가 않다. 겨우 올라 한숨을 돌리며 앞을 내다보니 시원한 풍광이 보답으로 펼쳐진다. 기봉사(奇峰祠)는 최영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지역에서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는 사당이다.

기봉사(奇峰祠)는 최영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지역에서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는 사당이다.

최영(崔瑩, 1316~1388)은 이곳 노은리에서 태어난 고려의 무신으로, 홍건적을 격파하고 왜구를 섬멸하였으며 평생을 청렴 강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이성계에게 비통하게 최후를 맞은 이후 이를 슬퍼하는 고려 백성의 가슴속에 남아 아직까지도 민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국의 무속인들은 아직도 그를 최고의 신으로 모시며 ‘영신제’등의 다양한 민간 행사를 지내고 있기도 하다. 최영 장군의 흔적은 홍성읍의 말무덤, 용봉산 활터, 금마 철마산 등에도 남아있다.

내포역사인물길 5코스는 최영 장군과 성삼문 선생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장군의 향기를 뒤로하고 기념스탬프에 인증을 마친 후 바로 뒤편으로 오르면 닭제산(165m)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향하면 대인리의 매봉산으로 가고 왼편으로 가면 노은단 수리봉에 닿는다. 여름철 내포문화숲길을 방해하는 3종 세트는 날파리, 모기, 거미줄이다. 이중 거미줄이 특히 지겨운 데, 작은 나뭇가지를 꺾어 휘두르면 효과가 좋다.

거미줄과의 한바탕 전쟁을 마치고 짧은 숲길을 돌아 다시 유허지로 향하는 하산 길은 심심하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마을로 닿는 조그만 대숲 옆에 이르니 갑자기 옅은 바람이 인다.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건 소나무와 낙엽뿐인데 어깨가 왠지 무거워진다. ‘독야청청 일편단심’ 성삼문의 기백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청렴결백한 최영 장군의 목소리가 살며시 어깨로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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