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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잘 모르겠는데요”…고향 홍성서 잊혀져 가는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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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잘 모르겠는데요”…고향 홍성서 잊혀져 가는 만해
  • 윤종혁
  • 승인 2022.06.2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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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길을 찾아서<1>
홍주읍성에 세워진 만해의 흉상. 만해 한용운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표 인물이다.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를 불꽃같이 살다간 한용운 선생.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면서 언론, 교육 활동을 활발히 하고 불교의 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했고,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했다. ‘만해의 길을 찾아서’ 기획취재를 통해 만해 한용운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자라나는 홍성 지역 청소년들이 만해를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이 누구인가요?’ 홍성에서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말이다. 만해 한용운은 홍성의 역사인물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홍성 청소년들에게 만해가 누구인지를 물으면 잘 모른다는 대답을 하곤 한다. 중학교 2학년 박현서 학생은 “만해 한용운에 대해 책으로만 배웠지 생가지는 안 가봤다”며 “솔직히 만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충남도는 2013년 충남지역 출신 문화예술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활용하기 위해 ‘충남을 빛낸 문화예술인 100인’을 선정했다. 만해 한용운은 100인에 선정됐다. 한용운 선생은 고종 16년이던 1879년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海 혹은 萬海)다. 그가 여섯 살 때까지 살던 생가는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지난 1992년 복원했다.

만해는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의병을 목격하면서 1896년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만해는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선사를 은사로 출가, 승려가 됐다.

1914년 4월에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했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을 발간했다. 1919년 만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구속됐다.

결성면 성곡리에 위치한 만해 생가지. 생가지에는 만해문학체험관과 만해사(사당), 민족시비공원도 함께 조성돼 있다.

독립운동을 전개한 스님이자 시인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만해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했다. 1922년부터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만해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3년 55세 되던 해 만해는 벽산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만해는 일제감정기 말기 민족적 의기를 꺾지 않았다. 1940년 만해는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요, 독립투사인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유해는 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한국문학사에서 만해는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만해는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했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 ‘후회’, ‘철혈미인(鐵血美人)’, ‘박명(薄命)’ 등이 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 일원에 전체 면적 5만496㎡ 규모로 총사업비 50억원을 들여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 조성 사업 추진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충청남도기념물 제75호)는 홍성역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에는 만해문학체험관과 만해사(사당), 민족시비공원도 함께 조성돼 있다. 체험관에는 그의 한시와 친필, 서적, 어릴 적 다니던 서당과 생의 마지막을 맞은 심우장 등 만해와 관련된 곳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생가지 뒤편 야산에 꾸며진 민족시비공원에는 만해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시인의 작품이 돌에 새겨져 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 일원에 전체 면적 5만496㎡ 규모로 총사업비 50억원을 들여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 조성사업은 만해 한용운 선사와 관련된 전시기능 보완, 주차시설 확충, 야외여가활동공간을 증대 등으로 방문객들에게 편안히 활동할 공간을 제공하고 만해 한용운 생가지의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추진됐다.

군은 이번 역사공원 조성으로 한용운선사생가지, 김좌진장군 생가지 등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전국적인 항일 정신의 성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사업은 △선사의 삶과 정신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조성 △기존 논두렁 지형을 최대한 변형하지 않는 공간 계획 수립 △공간의 이용행태를 제한하지 않는 다목적 공간 조성 등을 기본 방향으로 하고 있다. 서계원 문화관광과장은 “한용운 생가지가 단순한 역사공원이 아니라 주민과 관광객들의 눈과 발걸음이 머무르고, 역사문화 보존과 함께 시민휴식·문화체험의 마당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성군을 비롯한 서울 성북구, 서대문구 6개 지자체는 2017년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 지방정부행정협의회’를 구성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사진=홍성군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만해가 누구인지, 만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공부를 하고 배워야 한다. 특히 만해가 태어나고 자란 홍성군의 역할과 책임은 더욱 중요하다. 홍성 청소년들이 만해의 삶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홍성군을 비롯한 강원도 인제군, 고성군, 속초시, 서울 성북구, 서대문구 6개 지자체는 2017년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 지방정부행정협의회’를 구성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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