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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 석택리 유적 부활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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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 석택리 유적 부활을 꿈꾸다
  • 김영찬 기자
  • 승인 2020.08.2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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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석택리 유적의 긴 겨울잠
홍북읍 석택리 350-831번지 일원에 자리잡은 석택리 환호취락의 전경.

홍북읍 석택리에서 환호취락지가 발견된 것이 10년이 지났다. 발굴 당시 국내 최대 크기 원삼국시대 환호취락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가사적지 지정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조치없이 흙속에서 잠자고 있다. 다른 많은 지자체는 작은 문화유산이라도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국가사적지 추진도 한 방법이다. 이에 국가사적지를 추진하고 있거나 지정에 성공한 지자체들을 둘러보고 석택리 유적의 국가사적지 지정과 이에 필요한 노력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본다.

① 석택리 유적의 긴 겨울잠
② 창녕군 계성리 고분, 국가사적지 되다
③ 함양군 화과원 재조명, 불교계의 노력 
④ 울산시 개운포 성지, 시민이 앞장 선다
⑤ 석택리 유적 부활을 위한 제언

잠자는 홍주 2000년의 기억
홍북읍 석택리 350-831번지. 지금은 안내판만이 이곳이 원삼국시대 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을 뿐인 작은 구릉이지만 이곳에는 홍주 20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안내표지판 뒤로 난 작은 계단을 오르면 5기의 유구(집터나 무덤 등이 존재했다는 표식)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석택리 유적에서 유일하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나머지 석택리 유적의 모습은 여전히 흙 속에 있다. 지난 2012년 유적 일부에 대한 조사 후 후일을 기약하고 다시 흙으로 덮어 놓은 상태다.

홍북읍(당시 홍북면) 석택리 일대에서 유적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내포신도시를 조성하면서부터다. 석택리 유적 지하를 관통하는 내포신도시 예산 간 홍북터널 공사를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지난 2010년 11월 이 일대에서 취락지의 흔적이 발견됐다.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조사를 맡아 2012년 1월부터 같은 해 4월까지 정밀조사를 진행했다. 청동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약 1222기의 유구와 원삼국시대 유구 등 대규모 환호취락이 발견됐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석택리 유적이 상당한 크기인 것이 확인됐다. 특히 발굴 조사가 진행됐던 A지구의 대규모 환호취락은 조사 면적만 3만199㎡(1지구 2611㎡, 2지구 2만7688㎡)에 달한다.

석택리 유적에서 유일하게 복토되지 않은 5구의 유구 흔적.

원삼국 최대 규모 유적, 학계 주목
발굴 당시 학계의 관심은 높았다. 석택리 환호 유적은 기존 국내에서 발견된 원삼국시대 환호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조사에서 나온 유물들은 삼국시대 이전인 마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부터 철기 시대까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유적 내에는 청동기 ~ 조선 시대의 주거지 흔적 1000여 기, 분묘, 환호, 가마터, 도로, 고상 가옥 등의 유구가 발견됐다. 발굴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지만 상당한 규모로 조사가 더 진행됐다면 그 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택리 유적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이유는 그 규모를 볼때 삼한시대 충청지방에 존재했던 마한의 54개국의 하나인 감해비리국이나 심지어 마한의 맹주 목지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은 석택리 환호 유적에 대한 문화재 지정권고 의견(문화재청 발굴제도과-7134호, 2012.06.27.)을 제시하기도 했다. 발굴 당시 책임조사관을 지냈던 한얼문화유산연구원 박연서 과장은 “지금 보면 별거 아닌 규모 같지만 구릉지에 이 정도 규모의 취락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큰 규모다. 더 큰 규모의 유적이 발견된다면 모르겠지만 현재로는 석택리 유적이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유적의 일부에 대한 조사만 종료한 채로 2012년 7월 석택리 유적을 원형보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환호취락을 원형 복구하고, 발굴을 담당했던 한얼문화유산연구원도 조사를 종료했다. 당시 원형보존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미 담당자가 바뀌어 당시 결정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언론보도를 미루어 보면 유물 발굴보다 내포신도시 건설을 우선시 한 것 아니냐고 짐작할 뿐이다.

이런 문화재청의 결정에 대해 학계에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사회,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청동기학회는 2012년 8월 ‘홍성 석택리환호유적 보존 결정에 대한 한국청동기학회의 견해’라는 성명을 내고 문화재청의 원형보존 결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석택리 유적이 연질의 기반토로 된 구릉에 자리해, 성토 복구하는 과정에서 이미 노출된 유구와 유물이 유실될 것’이라며 ‘유적의 각 집자리가 중복되어 있고 집자리의 선후관계는 마을의 구성과 유적의 역사적 성격 규명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료이다. 이미 노출된 유구의 성격을 밝히지 않은 채 복토한 후 다시 발굴한다고 하여도 유적의 훼손을 불가피하며, 유적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 또한 망실될 우려가 있다’고 전면적 발굴을 주장하기도 했다.

원형보존 결정, 그 후

석택리 유적 앞 안내표지판.

이후에도 석택리 인근에서는 유물이 계속 발견됐다. 2014년 3월에도 석택리 유적과 밀접한 사유지에서 무덤을 이장하던 중 백제시대 횡혈식 또는 횡구식 석축고분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확인되어 긴급수습 발굴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조사 당시 석재 발견 장소인 홍북읍 석택리 478-14번지 일대 505㎡를 조사한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1기, 원삼국시대 주구 3개, 원삼국시대 옹관묘 1기 백제시대 석축분 4기, 시대미상 수형 4기, 시대미상 토광묘 2기 등 총 15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추가 정밀조사가 필요함에도 석택리 유적에 대한 조사가 늦어지는 이유는 유적 주변을 묘지 등 사유지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석택리 유적 발굴 당시 군에서 학예사로 있으면서 발굴과정을 지켜봤던 문광철 도 학예사는 추가 정밀조사와 문화재 지정과 관련해 “당시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개최했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미 매장문화재가 있다는 이유로 규제를 받고 있는데 지정문화재가 되면 자신들의 피해는 어떻게 하냐고 주장했다"며 주민들의 반대가 컸다고 회고했다.

다행스럽게도 늦긴 했지만 석택리 유적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홍성군은 지난 2월 충남도에 석택리의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을 요청한 상태다. 도 문화유산과 김성수 주무관은 “10월 경 현지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진행할 생각이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인근 사유지를 매입하는 방안도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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