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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강제징용 피해 숨어들었던 용봉산 ‘호랑이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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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강제징용 피해 숨어들었던 용봉산 ‘호랑이 굴’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8.12.16 2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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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봉산 모습

우리 주변에 전해오는 옛이야기들 중에는 호랑이 얘기가 참으로 많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주변에는 호랑이가 많았던 듯하다. 일상생활에서 호랑이를 만났던 사람들의 얘기가 심심찮게 전해온다.

 우리고장 용봉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던 사람들의 얘기가 재미있게 전해온다.

 용봉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덕산면 둔리 마을에 힘이 장사였던 이씨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면사무소 노무계 직원이 징용영장을 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노무계 직원은 징용영장을 내보이며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힘이 장사였던 이씨는 노무계 직원을 밀치고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밤에 일본 순사에게 연행될 것을 염려하여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렇게 징용을 피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씨는 용봉산 후미진 가루실 골짜기로 들어가 작은 움막을 파고 숨었다. 큰 바위에 의지하여 나무를 베어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천정을 만들고 흙을 덮어 감쪽같이 은폐해 놓았다.

 도피 첫날밤을 움막에서 자는데 달빛이 나뭇가지 틈으로 비쳐 들어왔다. 처량한 생각이 들어서 잠 못 이루다가 밤늦게야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움막 천정에서 흙이 우수수 쏟아져 내려왔다. 천정 위에서 커다란 짐승이 으르릉 거리며 흙을 긁어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천정의 흙이 모두 쏟아져 내리고 소나무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빛에 비친 짐승은 호랑이였다. 이씨는 소나무 가지가 모두 파헤쳐지면 호랑이에게 잡혀먹을 것만 같았다.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이씨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죽을 힘을 다해서 주먹을 내뻗었다. 힘이 장사인 이씨가 호랑이 배를 주먹으로 강타한 것이다. 순간, 호랑이는 고함을 지르며 용수철처럼 뛰어서 달아났다.

 이씨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은신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후 해방이 되고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홍성지역에 인민군이 들어오고 공산당원들이 활개를 칠 때였다. 공산당원들에게 우익계 인물들이 붙들려가서 수난을 당하는 일들이 생겼다.

 홍성군 제헌의원 손씨는 공산당원들의 주요 타킷이었다.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서 이집 저집 전전하다가 용봉산으로 들어갔다. 용봉산 서쪽 기슭 바위 아래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아들과 함께 지냈다.

 용봉산 은신처에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은신처 바위꼭대기에서 “앙‘하고 기차 기적소리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올려다보니 온몸에 줄무늬가 얼룩얼룩한 호랑이였다.

 손씨 부자는 온몸이 얼어붙어서 꼼짝달싹 못하고 호랑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호랑이는 손씨 부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앞발을 움츠리고 궁둥이를 추켜세우며 몸을 한번 들썩했다. 그리고는 방향을 돌리고 어슬렁어슬렁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손씨 부자는 날이 새면서 다른 지역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은신처를 옮기고 5일 후에 수복이 되었다.

 후에 손씨가 호랑이를 만났던 당시를 회상했다.

 “호랑이 외마디 울음소리가 그렇게 우렁찰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는 무서운 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도 겁이 난다. 피신을 못하고 집에 있다가 불행을 당한 동지들이 홍성군만도 200여명이 넘는데, 자신은 산중에서 고초를 겪은 덕분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했다.

 손씨가 당시에 숨어들었던 용봉산 가루실 골짜기는, 일제강점기에 둔리에 살던 이씨가 강제징용을 피해 숨어들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고 한다. 이 얘기는 1996년에 발행한 덕산 향토지에 실려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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