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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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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공주 ‘공산성’
  • 김정헌<동화작가·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 승인 2017.12.12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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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임금과 인절미의 유래
▲ 공산성 모습.

옛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가면 유유히 흐르는 금강 옆으로 공산성이 우뚝 서있다. 공산성은 조선시대 1624년에 이괄의 난으로 한양이 점령되면서 인조임금이 부랴부랴 피난 와서 머물던 성이기도 하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온다. 이와 같은 불만이 난을 일으킨 요인으로 역사는 전해온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세력다툼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을 심하게 경계하며 반역음모 혐의로 붙잡아 가두거나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 중에 하나라는 설이다.

당시 집권층은 이괄을 모반혐의로 붙잡아 들여 진상을 국문하라고 건의했으나 인조임금은 이를 묵살하였다. 대신 이괄과 함께 군중에 있는 외아들을 불러 모반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괄은 아들이 모반 혐의로 죽게 된다면 자신도 온전할 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아들을 압송하러 달려온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괄의 난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이 아니고 집권층의 지나친 경계와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라는 것이다. 이괄의 난은 이괄의 잘못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반란을 불러왔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이괄은 평안도 영변에서 난을 일으키고 무력한 관군을 패퇴시키며 19일 만에 한양에 입성했다. 한양 코앞까지 반란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임금과  대신들은 한밤중에 부랴부랴 피신하여 공주로 향했다.

▲ 쌍수정 모습.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서 공주부근까지 왔는데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공주에서 가까운 우성면 목천리 근방의 임씨 댁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임씨 댁에서는 급하게 마련한 음식을 인조임금에게 진상했는데, 음식상에는 콩고물을 묻힌 떡이 가득 놓여있었다고 한다.

인조임금이 먹어보니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임금은 서너 개를 연거푸 먹은 후에 묻기를,

“절미(맛이 아주 좋다는 뜻)로구나. 기가 막힌 절미야. 그런데 떡 이름이 무엇인고?”

그런데 아무도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떡은 어느 댁에서 만들어 왔는고?”

 “임씨 댁에서 만들어 올린 것이옵니다, 전하.”

임금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임씨라…. 그것 참 절미로다.”

그후로 떡을 임씨네가 만들었다고 하여, ‘임절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발음이 변하여 ‘인절미’가 되었다.

공산성 쌍수장 앞에는 인조임금과 인절미의 유래를 전하는 안내판이 서있다.

한편 인조임금은 공산성 안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한양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의 진압소식을 들은 인조임금은 너무도 기뻐서 며칠 동안 기대고 섰던 나무에 정삼품퉁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후에 두 그루 나무는 고목이 되어 고사하였고, 1734년에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 이름은 두 그루 나무가 서있던 곳에 세웠다는 뜻으로 쌍수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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