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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용 교수의 우리말 산책/보수·진보논쟁과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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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용 교수의 우리말 산책/보수·진보논쟁과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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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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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에서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있었으며, 인류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여야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면서 민주당에서는 '보수와 진보' 논쟁이, 한나라당에서는 '원조 보수'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교양과 상식이 모자란 일부 후보의 언행은 블랙코미디 수준을 넘은 지 오래다.
언어관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존재한다.
보수적인 언어관이란 언어는 신이 만들어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원어(原語)는 신의 언어와 같았을 테니까 신과 소통할 때는 이 원어나 원어에 가까운 고어(古語)를 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힌두교에서 힌디어의 옛말인 산스크리트어를 쓰고 이슬람교의 코란이 고전 아랍어로만 쓰여 있으며 천주교에서 미사를 드릴 때 근래까지 라틴어를 썼으며 개신교에서 기도할 때 고어를 쓰는 것 모두가 이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인 언어관이란 언어는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발명하였다는 믿음을 말한다. 언어란 인간들이 서로 협동하여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창안해낸 의사소통의 수단이란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알맞게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계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생각 차이에 따라서 교파가 나뉘기도 한다. 기독교의 예만 보더라도 흔히 보수 성향이 짙은 천주교와 진보 성향이 강한 개신교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진보적인 신부님이나 성당이 있으며, 보수적인 목사님이나 교회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기도문의 표현만을 대상으로 하면 개신교는 보수적인 언어관을, 천주교는 진보적인 언어관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개신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주기도문은 1937년 번역된 개역(改譯) 성경의 마태복음 6장 9절∼13절을 따온 것으로 예수가 직접 가르쳐준 '기도 중의 기도'라는 의미에서 주기도문으로 불린다. 다음은 주기도문 원문이다. 개신교의 주기도문과 천주교의 주기도문을 차례로 제시한다.

<개신교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천주교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개신교의 주기도문은 현대인에게 낯선 옛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어법에 맞지 않은 표현과 잘못 번역된 부분도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개신교의 '주기도문'을 다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다음은 개신교 주기도문 표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주요 내용이다.
① '우리 아버지여'는 '우리 아버지'로 고쳐야 한다. 현대어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 호격조사 '-여'를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옛말에는 극존칭은 '-하'(세존하)로, 예사 존칭은 '-여'(문수사리여)로, 평칭은 '-아(아난아)'로 나누어 썼다.
②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나라이'
한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 학생의 78%, 청장년의 42%가 '나라이'를 '나라에'로 잘못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에'라고 할 때 내용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라이'란 표현은 500년 전의 표현이며 현대국어에서는 당연히 '나라가'로 바로잡아야 한다.
③ '받으시오며'와 '임하옵시며'
존경의 선어말어미 '-시-'는 어간의 바로 다음에 놓여야 하므로 '하옵시며'는 '하시오며', '주옵시고'는 '주시옵고', '마옵시고'는 '마시옵고' 등으로 일관성 있게 쓰거나 아예 천주교 쪽처럼 '임하시고'처럼 쓰는 게 낫다.
④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뜻'이 주어이면 그것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루는' 것이 아니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
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의 '오늘날'
이 낱말의 그리스어 원어인 세메론(semeron)은 24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오늘'이지 결코 여러 날 또는 한 시대를 가리키는 '오늘날'이 아니다.
⑥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의 '대개'
'대개(大蓋)'는 개역 성경의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찬송가에 덧붙인 주기도문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말 성경 번역의 참고자료가 됐던 중국어 성경의 '蓋'를 참조한 것으로 원문의 '호티(hoti)'에 대한 번역이다. 원어 호티는 '왜냐하면 ∼ 때문이다'의 뜻으로 그 부분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뜻이다. 문장 흐름상 이 같은 접속사를 쓰기 어렵다면 '대체적으로'로나 '거의' 따위로 오인되는 이 낱말은 성경 본문에서처럼 차라리 빼는 게 좋다.
개신교 쪽에서 수많은 오류와 부작용이 있는데도 옛 말투의 주기도문을 고집하고, 천주교 쪽에서 신의 언어 창조설은 유지한 채 현대인에게 맞게 주기도문을 다듬어서 쓰는 것은 다 보수와 진보의 생각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개신교 쪽에서는 언어가 변할수록 신의 뜻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며 이런 변화는 인간의 잘못이며 인간이 타락하였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듯하다.
<독자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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