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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부보상 전통 어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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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부보상 전통 어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 승인 2015.11.09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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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바지게’를 아시나요 …

▲ 덕산바지게 모습.
몇몇 지인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덕산(德山)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덕산온천을 떠올렸다. 윤봉길의사 유적지인 충의사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부보상 유적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수덕사와 가야산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가 원하는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어려서 ‘덕산 바지게’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사람들이 입을 쫙 벌리고 하품을 하면, “입이 덕산바지게 만하다”고 놀리곤 했다. 옛날 어른들은 사람들의 큰 입을 덕산바지게에 비유하곤 했다. 아마도 덕산바지게가 충청도 인근에서는 제일 컸던 모양이다.

바지게는 옛날 시골에서 짐을 나를 때, 지게 위에 얹어놓고 이용하던 운반기구이다. 산에서 자라는 싸리 등을 촘촘하게 엮어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 사용했다. 바지게를 지게 위에 얹어놓고 앞뒤를 벌려놓으면, 큰 입을 쫘악 벌리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어린 병아리를 기를 때도 바지게를 쫘악 벌려서 땅바닥에 거꾸로 엎어놓고 닭장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덕산바지게가 인근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특별히 큰 이유라도 있었을까?

아마도 덕산바지게의 유래는 부보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덕산은 과거 인근지역 부보상(負褓商)의 중심지였다. 과거에 주변 15개 지역 장시를 관할하던 부보상 본부인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자연스레 덕산은 인근 부보상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 했을 것이다.

▲ 윤봉길 의사가 고향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서있던 느티나무.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 마을 입구)
윤봉길 의사 고향 마을

부보상은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을 합친 말이다. 부상은 짐을 지게에 지고 다녀서 ‘등짐장수’라고도 했다. 또한 보상은 짐을 보따리에 싸서 이거나 들고 다녔기 때문에 ‘봇짐장수’라고도 했다.

덕산에 근거를 둔 부보상들은 주변 높은 산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하여 바지게를 마음껏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큰 바지게에 많은 짐을 싣고 다니며 주변 장시를 누볐으리라.

한편 윤봉길의사의 고향마을인 덕산면 시량리는 ‘목바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목바리라는 마을 이름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인근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목바리 역시도 부보상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목바리는 옛시절에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마을입구는 덕산과 서산과 홍성으로 통하는 삼거리길이어서 주막이 많았고 부보상들의 쉼터였다. 주막마다 덕산장과 인근 장을 오가는 부보상들의 지게가 줄지어 서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지게다리가 목발을 나란히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들이 목바리라는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옛날에 목바리 마을 입구는 성황당이 있었고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지금은 고사되고 새끼나무가 옆에서 자라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고향마을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서있던 자리라고 전해온다.

이 느티나무야말로 참으로 의미있고 소중한 문화유적이 아닐 수 없다. 잘 관리되고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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