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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부흥원(復興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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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부흥원(復興院)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 승인 2015.10.2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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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독립운동 불씨 되다

▲ 독립운동의 불을 지핀 도중도 공원(생가와 부흥원이 위치함).
우리고장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윤봉길 의사 유적지인 충의사가 있다.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을 비롯하여 기념관과 계몽운동을 펼쳤던 부흥원 및 생가 등이 보존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에 있었던 중국 홍구공원 의거의 주인공이다. 당시 홍구공원에서는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와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행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 행사에 윤봉길 의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후에 곧바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바람에 일본군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8일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2월 19일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순국하였다.

▲ 홍구공원 의거에 앞서 친필로 쓴 선서문.
윤봉길 의사의 의거 소식을 접한 중국 총통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고 칭송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드높이며, 중국영토 안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은 고향마을 생가에서 펼친 계몽운동부터 시작되었다.

1924년 어느날이었다.

집 앞을 산책하던 윤봉길 의사는 공동묘지에서 뽑아온 묘표를 가슴에 가득 안고 다가오는 청년과 마주쳤다. 청년은 윤봉길 의사를 만나자마자, “선생님, 이 묘표 중에서 저희 부모님의 이름을 찾아주십시오.”

하며 간청했다. 윤봉길 의사는 묘표 가운데에서 어렵지 않게 청년의 부모님 이름을 찾아주었다.

“이 묘표들의 위치는 모두 표시해 두었습니까?”

윤봉길 의사는 무언가 미덥지 않은 모습이 보여서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잠깐 머뭇머뭇하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청년은 뒤늦게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은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청년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른사람의 산소까지 위치를 알 수 없게 만든 청년의 무식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청년의 무식이 바로 나라를 잃게 만든 적이로구나.’

이날의 묘표사건은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하였다. 점점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집옆에 장소를 넓힌 부흥원(復興院)을 짓고 야학과 함께 농촌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윤봉길 의사는 무지를 몰아내고자 야학을 개설하였고 가난을 몰아내고자 저축과 생활개선 등에도 힘썼다. 또한 월진회를 조직하여 민족단결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농촌계몽 애국 강연회 등을 펼쳐나갔다.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망명과 의거를 결심한 곳이 바로 야학당인 부흥원이다. 이곳 도중도공원 안에 있는 부흥원이야말로,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 불씨를 지핀 역사적인 뿌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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